그것은 내가 열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평범한 또래의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부모님은 할리 서커스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의 스타였고, 나 또한 그 팀의 단원이었다. ‘플라잉 그레이슨.’ 나의 부모님, 존과 매리는 그 누구보다 높이 하늘을 날았다. 내가 가진 제일 오래된 기억은, 두 마리의 새처럼 유연하게 하늘을 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것이다. 서커스단에서 태어나 인형 대신 밧줄을 잡고 자란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아빠, 엄마와 함께 하늘을 날고 싶었고 그들을 제법 흉내 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함께 무대에 올랐다. 내가 작고 가벼운 몸을 공중으로 날리면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하늘로 솟구친 몸이 중력에 의해 떨어져 내릴 때도 존과 매리의 단단하고 유연한 팔이 나를 지탱했다.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부모님의 따뜻한 손과 사람들의 함성. 그 두 가지가 함께 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어린 나의 행복을 깨버린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다. 공연 중에 추락 사고가 일어나버린 것이다. 아빠와 엄마, 두 사람의 견고한 팀워크가 돋보이는 고난이도 아크로바틱 공연이었다. 부모님의 연습에 종종 끼어들던 나는 공연에 함께하고 싶었으나 단장은 나를 막았다. 대신 부모님의 새로운 공연이 성공하면 나를 껴서 프로그램을 구성해주겠다고 약속했기에, 무대 뒤에서 공연을 지켜보기로 했다. 부모님은 공연을 틀림없이 성공시킬 것이고, 나는 또 다시 '플라잉 그레이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나는 부모님의 추락을 목격했다.
수백 번도 더 연습한 동작이었다. 존과 매리라면 눈을 감고서도 가능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부모님은 미끄러졌고, 하늘 높이 매달린 바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 우리 부모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하늘을 날던 새가 총에 맞아 떨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떨어진 부모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달려온 구급차가 그들을 실어 나갈 때야 나는 그게 우리 부모님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존과 매리가, 그러니까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내 곁을 떠나고 나도 할리 서커스단을 떠나야만 했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나를 버린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몰랐다. 단장은 나를 낡은 위탁가정에 맡기며 말했다. 열다섯 살이 되어 공연하기 알맞은 나이가 된다면 나를 데리러 올 것이고 내게 '플라잉 그레이슨‘을 맡기겠다고. 당시 서커스단원 중에 가장 어린 단원의 나이가 열다섯이었고, 그보다 어린 아이들은 모두 보호자가 있었기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빨리 나이를 먹고 다시 할리 서커스단에 들어가, 부모님을 대신해 ‘플라잉 그레이슨‘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어린 내게 남았던 것은 ’플라잉 그레이슨’, 그 하나였기 때문에 모든 순간에 그것을 생각했다. 고담의 빈민촌에 위치한 위탁 가정에서 가장 좁고 낡은 다락방에 쭈그려 잠을 자고, 지저분하고 어두운 거리에서는 제대로 연습 한 번 할 수 없었지만 한 순간도 꿈꾸지 않은 순간이 없다. 나는 ‘플라잉 그레이슨’ 의 부활을 꿈꿨다. 다시 한 번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부모님처럼 높고 멀리 날 수 있을 거라고. 곰팡내 나는 벽 한 켠에 붙은 포스터를 보며 꿈꿨다.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을 품고 있던 내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서커스단에서 자란 탓에 나는 그때까지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배운 것들은 서커스단 사람들에게 주워들은 잡스러운 지식과 기술들뿐이었다. 그러나 위탁가정에 맡겨지면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를 다녀야 했다. 또래가 가득한 새로운 공간을 경험한다는 설렘은 잠시였다. 나는 평범한 아이들과 너무도 달랐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을 나는 몰랐고, 내가 경험한 것들은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경험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것들이었다. 서커스단의 위험하고 커다란 짐승들과 함께 한 이야기나 놀라운 묘기를 보이는 배우들과의 일화는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내 또래 아이들보다 우월한 운동신경은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동시에 나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
학교에서 나는 독특하다 못해 특이한 아이였다. 아이들은 자신들과 너무 다르게 살아온 나를 배척하고 놀렸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 당시의 나는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때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자라온 터라 꼬마 아이 몇 명의 비방과 미움 정도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지, 머릿속이 온통 ‘플라잉 그레이슨’으로 가득해서 아이들의 놀림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건지 모른다. 아무튼 나에겐 원대한 야망을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친구가 있었고, 그녀만으로 충분했다.
바바라 고든은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똑똑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는 나를 친구로 맞아준 정의로운 소녀였다. 경찰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매일 아침 음침하고 더러운 거리를 한참이나 걸어 스쿨버스를 탔는데, 매번 곁에 앉아주는 바바라 덕분에 학교에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 가득한 새들을 보며, 나는 할리 서커스단의 새들을 떠올리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나의 어깨를 바바라가 두들겼다. 고개를 돌린 나의 앞에는 바바라의 예쁜 얼굴과, 조금 굳은 얼굴의 제이크가 보였다.
제이크는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였다. 키가 나보다 한 뼘 가량 크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었는데, 장난 끼가 많고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니는 타입이었다. 요즘 들어 그의 시선을 종종 느꼈기에 제이크가 바바라와 친한 나를 질투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뜸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굳은 제이크의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던 바바라는 우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곤,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가 떠나자 제이크는 나의 눈치를 살피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제이크는 나를 질투한 것도 심술을 부리러 온 것도 아니었다. 제이크는 나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방과 후에 시간을 내달라는 짤막한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학교에서 일과를 보내며 제이크와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셔틀버스를 타러가는 내 앞을 가로 막은 제이크와 친구들의 굳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이크는 나를 붙잡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더니, 도시 외곽을 도는 버스를 태웠다. 아이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긁어모은 동전으로 나의 차비를 지불하고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 앉은 후에야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담 외곽에 있는 유령의 집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아이들이 입을 열어 전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예전에 고담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사람들은 부자면서도 마음씨도 고와서, 고담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한다. 건물을 세워 병원도 짓고 학교도 만들어 주어서,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했단다. 그 집에는 잘생긴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결혼을 바로 며칠 앞두고 그 부자의 집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커다란 집을 모두 태워버릴 정도의 큰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부부는 불 속에서 죽음을 맞고, 형제는 겨우 빠져나오지만 한 명은 큰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되어 버린다. 그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두 형제가 집을 떠나면서 시커멓게 타오른 집만이 남았는데, 아무도 없을 그 곳에서 계속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빈 집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는 유령이 낸 것이며 불이 난 것도 유령이 한 짓이라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는 소문이 생겨, 결국 유령의 집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담에 온지 불과 3주밖에 안된 내가 그 이야기를 알 리 없었다. ‘괴담’을 들은 나는 멍한 얼굴을 했다. 아이들은 나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했다.
“우리는 지금 그 유령의 집에 가는 거야.”
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이들은 그제야 만족한 듯 웃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 아이들의 뒤를 한참이나 쫓아갔다. 자가용이 드나들기 용이하도록 깔린 포장도로는 약간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우리는 한참이나 헉헉 대면서도 열심히 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나 인기척이 없어 무척 조용했고, 길 곁에는 오로지 푸른 강물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외딴 곳에서 불이 나면 소방차가 오기 전에 집이 모두 타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도착한 유령의 집은, 울창하고 크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무성한 하나의 숲처럼 보였다. 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서 안쪽의 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쇠 울타리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팔을 늘어뜨린 나무들은 정말 크고 무시무시했다. 몹시 낡았지만 튼튼하고 커다란 쇠기둥이 뾰족뾰족하게 서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나무들을 꽉 잡아 놓는 듯했다. 화재나 부부의 죽음 같은 불길한 이야기가 없어도 이런 모습이라면 유령의 집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게 보였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호기로움은 어디 갔는지, 아이들은 바위에 붙은 따개비 마냥 옹기종기 붙어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대체 이 정원에 들어가겠다는 이유가 뭐야?”
제이크는 곁에 선 톰을 바라보았고 그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유령의 집 근처에서 담력훈련을 한답시고 모인 날, 공놀이를 하다가 야구공 하나가 울타리 너머로 넘어갔는데 그 공이 하필 톰의 아버지가 몹시 아끼던 사인볼이라 문제가 생겼다.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있고, 울타리는 너무 높아서 제이크와 친구들이 모두 울타리를 넘으려 며칠 동안이나 노력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단다. 부모님께는 외진 곳에 함부로 갔다고 혼날까봐 말도 못하고, 저들끼리 끙끙거리며 해결하려다가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체육 시간에 높은 철봉을 오르는 몸놀림을 봤다면서 톰이 눈을 반짝거렸다. 서커스단에서 나온 뒤, 나에게 저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톰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울타리 앞으로 나섰다.
매끈한 울타리는 도통 잡을 곳이 없어보였지만, 커다란 나무가 울타리 이곳저곳으로 삐져나와 있기에 오르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 유령의 집의 울타리를 너무 얕봤다는 것은, 불과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조심해, 딕! 오른쪽 가지를 붙잡아!”
“아냐, 그거 부러질 거 같아! 점프를 해서 한 번에 뛰어넘는 거야!”
나는 성벽처럼 높게 솟아있는 쇠 울타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공연 중에는 분명 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도 무리 없이 올라갔는데, 원래 사람이 매달리고 넘어갈 수 있는 용도가 아닌 울타리는 무척 불편했다. 힘껏 잡고 있는 쇠는 녹슬어 낡은 탓에 녹이 묻어나 미끄러웠다. 요란한 아이들의 소리에 흘깃 고개를 돌려 뒤를 내려다보면 다섯 명의 소년이 돌아보지 말라는 둥, 자기 말을 들으라는 둥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저 아이들은 분명 좋은 관객은 못 될 것이다.
땀으로 젖은 손이 울타리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내 손이 한번 미끄러질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다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이, 이 정도도 오르지 못하면 '플라잉 그레이슨'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빠라면, 엄마라면 이런 울타리쯤은 날듯이 넘으셨을 것이다. 운동화를 신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나는 대롱거리면서 팔 힘으로만 울타리와 가지에 매달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아이들의 아우성이 귓전을 흔들었다.
“이러다 다치겠어! 딕, 그냥 내려와! 너무 위험해!”
이를 악문 상태여서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입을 열 수 있다면 난 떨어지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었다. 아빠와 엄마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지만 추락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오히려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 정도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나는 이것보다도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깊게 한 번 침을 삼키고 울타리를 양 발로 차며 몸을 위로 날렸다. 울타리 위의 뾰족한 장식이 발목 부근을 따갑게 스쳤다. 나는 주저 없이 팔을 뻗어 울타리 위로 가지를 내리뻗은 커다란 나무를 감쌌다. 내 한쪽 발이 굵은 나뭇가지를 디딘 순간, 아이들의 탄성이 길게 들렸다. 딕이 성공했어! 할 줄 알았다니까!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곳, 소리치는 목소리들. 마치 ‘플라잉 그레이슨’으로 무대에 섰을 때와 같은 감각이라, 가슴이 뛰었다.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는 안도감과 감격어린 한숨이 가늘게 뻗어 나왔다. 그리고,
“딕, 조심해!”
나뭇가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내 발밑을 지탱하던 것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내 몸이 울타리 반대편으로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나는 양 팔로 머리를 감싸고 몸이 받는 충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몸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몸이 바닥에 떨어지고 등과 허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길게 자란 잔디가 뺨을 스쳤다. 잔디라기엔 꽤 길이가 긴 풀들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나는 웅크린 자세로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안쪽의 상황은 울창한 숲처럼 보이던 밖과 별 다른바가 없었다.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 때문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무성한 풀들은 밟으면 자박자박 소리가 났다. 제2의 울타리마냥 시야를 차단한 나무 저편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딕? 너 살아 있어?”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여기 숲이 너무 넓은 걸. 공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 같아.”
나는 두리번거리며 톰의 공을 찾기 시작했다. 울타리에서 멀어져 좀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나무와 풀 너머로 물 한 방울 없이 말라붙은 낡은 수영장과, 그 뒤에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건물을 모두 태웠다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유령의 집이라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 어디선가 저벅 저벅 풀을 밟는 낯선 아닌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가슴이 떨렸다. 유령이 온 것이다. 유령에게 발소리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생각난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울타리 반대쪽의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도망가! 유령이 나타났어!”
나의 외침에 정신없이 떠들던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톰의 것으로 들리는 울먹이는 소리가 가장 나중에 멀어졌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망을 치기 위해 밟고 넘어온 나무에 올라가려했다. 그러나 뛰어넘는 동작보다 빠르게 내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닿았다.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다니. 겁도 없는 꼬맹이군.”
유령의 목소리치곤 음침하거나 괴기스럽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조금은 차갑고 낮지만, 시원스럽게 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말끔한 유령의 목소리인 탓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유령이 아니라 그저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마주친 눈이 무척 시린 하늘빛이었다.
“아저씨는 유령이 아니잖아요.”
내가 느낀 것이 안심인지 실망인지, 무언가 김이 샌 듯 한 목소리가 나갔다. 내 소리를 들은 남자는 눈썹을 지켜 올렸다. 그리곤 유령이건 아니건 이 정원에 침입한 것은 혼이 나야 한다고 으름장을 뒀다. 유령이 아니라니, 내 목 뒤에 오소소 돋던 소름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쿵쾅거리며 뛰던 심장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는 정원이 아니라 숲 같은 걸요.”
“...정원이야. 저기에 저택이 있잖니.”
“이렇게 풀이 길고 나무가 무성한 정원이 어디 있어요? 집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냥 커다란 숲으로 보일 거예요.”
“...”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남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때 나무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튀어나왔다. 불쑥 튀어나온 그는 나이가 꽤 많아 보였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계셨군요.”
“손님이 아니에요. 알프레드. 이 꼬마는...”
“안녕하세요, 딕 그레이슨이라고 합니다. 친구가 유령의 집에서 공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찾으러 왔어요.”
유령의 집이라는 나의 말에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알프레드라고 불린 나이 많은 사람은 나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며 웃어보였다.
“알프레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의 목소리가 정말 부드럽고 친절해서, 나도 모르게 ‘네, 알프레드’라고 대답해버렸다.
알프레드는 나를 저택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남자가 반대했지만, 알프레드가 나의 발목에 작은 상처를 가리키자 남자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정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발목에 난 상처는 그리 심한 게 아니었지만 알프레드의 친절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부축하듯 잡고, 우리는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령의 집’은 정말 놀라웠다. 가까이 갈수록, 그 형체가 드러날수록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단단한 것이,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멋들어지게 휘어진 계단을 오르며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자 알프레드가 작게 웃으면서 나를 안으로 들였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밟자 큰 홀에 소리가 울렸다. 아직 해가 떠 있음에도 응접실은 조금 어두웠는데, 음산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알프레드가 안내해준 대로 커다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너무 푹신한 나머지 그대로 앉아서 낮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앞에 있는 우아한 테이블은 먼지하나 없이 말끔했다. 정면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은 벽난로와 그 위에는 가족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이 있었다. 웃고 있는 여자와 남자, 그들 뒤로 서서 미소 짓는 두 형제. 그 중 하나는 바로 전에 정원에서 본 사람이었다. 두 부부와 두 명의 아들. 나는 아이들이 말해준 유령 이야기에 등장한 가족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알프레드가 구급상자를 들고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초상화, 유령 이야기에 나오는 가족 맞죠? 아까 정원에서 본 아저씨도 있어요!”
나의 질문에, 잔잔한 미소를 띠던 알프레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구급상자를 열고 자세를 낮추어 나의 발치에 앉았다. 그는 상처가 난 쪽 다리의 바지를 한단 접어 올렸다. 연고를 꺼내 바르는 손길은 담담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 슬프게 들렸다.
“이곳이 유령 이야기는 분명 몇 해 전의 화재 때문이겠죠. 잿더미가 된 건물을 이전과 같이 복원시키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지난달에야 공사가 마무리 되었죠. 공사가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림 속의 아저씨가요? 혼자 돌아 온 거예요?”
“동생 분도 함께 돌아왔지요. 그 사고로 두 분만이 살아남았으니까요.”
알프레드의 설명에 의하면,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집에서 공사하는 소리로 인해 유령의 집이라는 오해를 산 것이었다. 실제로 유령이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 안심했다.
떠나 있던 주인이 다시 돌아온 집은 천천히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고 알프레드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직접 본 저택은 무척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성과 같았다. 이 집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토록 아름다운 곳을 유령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는 알프레드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그가 가져다준 쿠키와 음료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나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쿠키를 먹으며 응접실의 커다란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아까 정원에서 마주친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장대로 나무의 가지들을 흔들어보다가, 바닥으로 허리를 굽혀 제 무릎에 조금 미치지 않는 풀들을 헤집기도 했다. 나는 알프레드에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의 질문에 알프레드는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며 조용히 미소만 지어보였다.
대체 뭘 찾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정답을 깨달았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알프레드를 쳐다보니,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먹던 쿠키를 내려놓고 잽싸게 뛰어나갔다. 알프레드와 한참은 걸어왔던 복도와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렸다. 뭐가 그리 급한지, 정원으로 향하는 돌도 점프하듯 밟았다. 나의 뜀박질 소리가 요란했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느새 그 남자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너무 빠르게 달려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면서도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찾으러 온, 공을, 찾는 거죠? 제 친구 공 말이에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의 발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의 상처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알프레드가 붕대로 꼼꼼하게 묶어준 다리를 자랑스럽게 들어보였다.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무척 밝았다.
“저도 공을 찾을게요. 사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정원의 다른 쪽으로 가버리려 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남자의 옷소매를 잡았다. 눈썹을 지켜 올린 남자가 뭐라 말을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 이름은 딕이예요. 딕이라고 불러주세요!”
“알아. 아까 들었다.”
“이제 아저씨 이름을 가르쳐 주셔야죠.”
“...브루스.”
“그러면 브루스라고 부르면 되는 거예요?”
남자는, 아니 브루스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내가 단단히 붙잡은 소매를 툭툭 흔들어 손을 놓게 한 그는 마음대로 하렴, 작게 말하고는 곁에 선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을 장대로 흔들어댔다. 브루스의 모습에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그리고 몸을 굽혀 기다린 풀밭을 헤집기 시작했다.
정원은 너무 넓고 너무 무성했기 때문에 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양 손 모두에 초록빛 풀물이 배어버릴 정도였다. 한참을 숙이고 있었던 탓에 혹사당한 허리가 아팠다. 몸을 뒤로 젖혀 스트레칭을 하고 주먹을 쥐어 허리를 두들겼다. 햇볕이 뜨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맑은 날씨였기 때문에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저만치 멀리 있던 브루스가 다가와서 내 곁에 섰다. 브루스는 키가 커서, 내가 들어가기 충분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정원이 너무 넓은 거 같아요. 그리고 풀이 너무 많아서 찾기 힘드네요.”
“저택을 떠나있는 동안 정원을 가꾼 사람이 없었으니까.”
“풀을 다 베어내면, 찾기 쉬울 텐데.”
브루스 또한 정원을 관리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리도 아프고 목이 말랐다. 브루스가 그런 나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손가락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저택 앞에는 어느새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알프레드가 차가운 음료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브루스를 이끌었다.
“그거 알아요? 집사님이 주시는 쿠키, 진짜 맛있어요.”
“초코칩이 박힌 쿠키를 말하는 거라면 동의하마.”
커다랗고 무뚝뚝하게 생긴 브루스가 초코칩 쿠키를 칭찬한 것이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왜 나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브루스를 이끌며 알프레드에게 달려갔다.
알프레드는 정원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닌 우리에게 달콤한 케이크와 직접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를 내주었다. 한껏 운동을 하고난 덕택인지 아니면 알프레드의 음식 솜씨가 뛰어난 덕분인지, 내가 먹어본 것들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다. 브루스는 나에게 제 몫의 케이크마저 밀어주었고, 나는 입으로는 거절하면서도 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눈 깜빡할 새에 브루스의 케이크까지 홀랑 먹어버렸다. 빵은 부드럽고 크림은 달콤했다. 내가 케이크와 과일주스에 심취해 있는 동안, 알프레드와 브루스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루스는 정원을 정리해야겠다고 말했고, 알프레드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전문가를 고용하면 사흘도 지나지 않아 예전 모습을 찾을 겁니다.”
“사람들을 부르는 건 안돼요, 알프레드. 알고 있잖아요.”
“링컨 도련님 때문이라면, 그들과 도련님이 절대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을 짜서...”
“그래도 안돼요. 링컨에게 불편을 줄 순 없어요.”
단호한 브루스의 말에 알프레드는 조용히 주장을 접었다. 나는 주스를 삼키며, 링컨이 누굴까 추측을 해보았다. 브루스와 함께 저택에 돌아왔다는 동생의 이름인 것 같았다. 알프레드는 둘이서 정원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겠다며 잔디 깎는 기계와 사다리, 정원 가위 등을 주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도 잔디 깎는 정도는 해본 적 있었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 좋은 계획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내 목소리에 브루스와 알프레드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제가 잔디를 깎을게요. 전에 잔디 잘 깎는다고 칭찬도 받았거든요! 그럼 제 친구의 공을 금방 찾을 수 있을 테고, 브루스네 숲도 금방 정원으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사용한 ‘숲’이라는 단어가 거슬리는지, 브루스는 잠깐 눈을 찌푸렸고 알프레드는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해주었다. 아까 잔디를 살피는 손이 무척 야무져 보였다며 내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응원까지 해주었다. 반면에 브루스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지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부모님이 허락 한다면 문제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톰의 공을 찾을 때까지 정원의 일을 돕기로 했고, 보수도 받게 되었다. 나는 돈 말고 알프레드의 케이크로 대신 받아도 되냐고 물어 둘을 웃게 만들었다.
하늘 높게 떠 있던 해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그의 양복만큼 까맣고 윤이 나는 자동차에 나를 태웠다.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브루스는 석양을 받으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답답하고 좁은 집이 아닌 공간과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내일 학교 끝나고 바로 올게요!”
내가 손을 흔들자, 브루스도 손을 들어 답해주었다. 두어 번 손을 흔들어주던 그는 다시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건물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햇볕에 반사되어 빛나는 여러 개의 창문 안쪽으로, 나는 문득 사람의 형상을 봤다. 그러나 눈이 부셔 잠시 감았다 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략
-쓰다보니 47페이지까지 늘어난 원고였습니다ㅜㅜ엄청난 분량 조절의 실패...ㅇ<-<
전체 공개가 가능해지면 전문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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