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는 건전하기 때문에 공개입니다^^
이번주 안에 한 화를 올릴 생각이었는데 주말에 겨우 올리게 되었습니다ㅋㅋㅋㅋㅋ그것도 제 존잘님의 재촉으로 가능했던 일ㅠㅠㅠㅠㅠ감사해요ㅠㅠㅠㅠ흡
애초에 풀었던 썰과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는 정말 다르게 풀려나가고 있지만ㅋㅋㅋㅋㅋㅋㅋ완결은 나겠죠...아마...8ㅁ8
“요즘 도망 다니냐?”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다 튀어나온 소리야, 치즈 샌드위치를 양 볼에 가득 채운 할은 그대로 고개만 까딱 올려 제 앞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 저 외모로 지구에 왔다간 사람보다 돼지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을 것이다. 손에 든 쟁반위에는 보기만 해도 입맛 떨어지게 생긴 것들이 꿈틀대고 있다. 성격은 정말 좋은 사람, 아니 외계인 인데 정말 센스가 없는 탓에 식사시간에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할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덩치 좋은 그는 할 앞의 탁자에 그 큰 쟁반을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자리를 잡았다. 킬로웍, 하고 그 이름을 부르려는데 입안은 방금 전에 잔뜩 밀어 넣은 빵 때문에 소리가 날 틈이라곤 없었다. 그 대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부지런히 빵을 씹어 삼키고 제 앞의 커피를 후르륵 마신 뒤에야 대답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할일도 없이 오아에 죽치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빚쟁이 피해 도망 온 모양인데 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그 끔찍한 것들을 먹어대는 킬로웍에게서 할은 제 커피와 샌드위치 조각이 담긴 접시를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쟁반을 당겼다. 비록 이리 저리 튀는 알 수 없는 조각들은 막을 수 없었지만. 할은 듣는 사람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을 던져 놓고는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하는 그의 정수리를 묘하게 노려봤다. 도망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사실 그의 말은 딱 절반쯤만 옳다. 이번처럼 별 다른 목적 없이 오아에 오랫동안 머물러 본 적은 없었다. 이곳저곳으로 파견되는 일이 많으면 많았지, 이렇게 본 행성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망친다는 말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다. 대체 뭐가 무서워서, 도망을 가나, 이 할 조던이.
그냥 조금, 답답했을 뿐이다. 그냥 그곳에 두 다리로 서서 버티고 있기가.
집에 머무르는 것이 답답했고, 제 천직이라고 여겼던 비행기 조종석이 답답하게 느껴졌으며 육중한 몸으로 우주에 떠있는 와치타워의 공기마저 답답했다. 덕분에 자동으로 지구를 벗어나 제 담당구역을 부지런히 순찰하게 되더라. 여느 날처럼 자잘한 사고들에 손을 대고 처리하는 하잘 것 없는 일들을 해결하며 빙글빙글 순찰을 돌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외계인이 있어서 오아에 들렸고 행성에 머물렀더니 중간 중간에 동료들이 백업을 요청하기에 따라 가주고 주변 순찰도 돌아주고 그동안 알게 되었던 행성들도 방문하면서 그렇게 며칠을 머물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멍하게 기다릴 틈도 없이 그냥 시간이 잘 갔다. 그뿐이었다. 이 할 조던이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할은 남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씹어대는 할의 표정을 슬쩍 본 킬로웍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이번에 새 임무를 받았으니 같이 가잖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도 떨어지고 고생만 예약해 논 당상이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 오랜만에 리그도 들려봐야 할 거 같고. 모든 빵조각을 씹어 삼키고 나서 곧바로 든 생각은, 일단 지구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제대로 된 치즈샌드위치를 사먹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킬로웍이 어떻게든 자기를 데려가려고 얕은 수를 쓰는 게 보여서 헛수고라고 한번 빈정대 주었더니 금세 저에게 욕을 지껄인다. 나쁜 놈, 못된 놈 하면서 그 입에 가득 찬 것들을 흩뿌리며 말하는 것에 자동으로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갑자기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나쁜 놈, 못된 놈. 그 소리를 들을 입은 따로 있는데.
바닥에서 얕게 찰랑대는 까만 액체가, 그보다 까만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어른어른하게 눈앞에서 흔들거린다. 지구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의 모든 목록 위로 가장 크게 떠오르는 그 잔상이 가슴 한 구석이 꺼끌거리게 만드는 탓에 할은 그 컵을 한번 흔들고는 단숨에 비웠다.
덜컥거리는 문고리가 제가 기억했던 것보다 더 거칠고 무기질적인 느낌이어서 기분이 미묘해졌다. 며칠 동안 머문 이 없이 방치되었던 집에선 제 냄새마저 흐려져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킷을 소파에 벗어 던지고 할 조던이 곧바로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출출한 속을 채울 것이 필요했다. 지구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먹겠다고 굳게 결심한 샌드위치는 사러가는 과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지치고 귀찮아 졌다. 그럼에도 엉덩이를 소파에 붙이지 않은 것은, 이대로 누웠다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속에 잠이 들어버리고 말거라는 경험에서 나온 지혜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 바닥난 체력으로 골골대다가 과식하지 않기 위해선 뭐라도 집어넣어야 한다. 이왕이면 맥주랑 한잔 할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
냉장고의 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뺨이며 목덜미까지 시원하게 적셔온다. 언제 사놨는지 기억조차 흐릿한 맥주 몇 개가 운 좋게도 남아있었다. 유통기한을 보니 가차 없이 지나가 있었지만. 잠시 갈등하다가 그냥 꺼내 들었다. 먹어도 별 일 없을 거다. 까짓 거 배탈 말고 더 큰 일이 있겠나 싶어서 냉장고문을 닫지도 않고 선 상태로 캔을 따서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마셨다. 싸한 탄산이 식도로 흡수되는 기분이 끝내준다. 역시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기분전환이 될 일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은 상쾌함이 들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맥주 캔 하나를 더 꺼냈다. 고픈 배를 잡고 다른 칸들을 뒤적여 봤지만 요리를 하지 않은 재료 상태의 것들이라 바로 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할 수 없이 선반에 놓여 있는 나쵸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거실 소파에 편히 주저앉았다.
소파에 늘어진 몸은 어느새 늘어져 흡수될 거 같은 피곤함으로 가득했다. 테이블에 나쵸 봉지를 헤집어 놓고 한손에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까만 몸체에 먼지가 쌓였기에 입으로 한번 후 불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터리가 얼마 없는지 제대로 인식 못하는 리모컨을 테이블에 두어 번 두들긴 다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진 뒤에 할은 이리 저리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딱히 끌리는 방송은 없었다. 채널을 돌리고 돌려도 끝없이 등장하는 채널들과 내용 없는 방송들을 보며 할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손을 놀려 나쵸를 집는다. 맥주의 안주로 먹는 것인지 끼니를 때우는 것인지 모를 경지에 이르도록 나쵸를 집어 들던 할은 방송에서 스쳐지나간 익숙한 사람의 이름을 듣고 동작을 멈췄다. 기계적으로 넘기던 채널을 다시 뒤로 돌렸더니 예쁘장한 리포터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었다. 고운 목소리로 말하는 기사에서 할의 귀에는 문장이 몇몇의 단어가 되어 들렸을 뿐이다. "고담의 브루스 웨인....심한 부상으로...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할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브루스 웨인이 입원한 병원은 고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이었다. 정신없이 반지의 힘을 이용해 집에서 뛰쳐나온 할은 병원의 맞은편 골목길에 몸을 숨겼다. 벌건 대낮에 온몸을 번쩍 번쩍 빛을 내며 여기 그린랜턴이 있습니다, 여기보세요, 하면서 고담에 왔다는 것을 그 녀석이 알게 되면 잔소리가 아주 요란할 것이다. 눈에 불 보듯 선한 시나리오 때문에 할은 조용히 변신을 풀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쵸를 무지막지하게 씹어댄 탓에 손가락이나 상의에 온통 과자 가루가 묻어 있다. 옷을 팡팡 떨어내고 손은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손이라도 씻고 올걸 그랬나 싶지만 아까는 그런 것을 살필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미친 듯이 집에서 나온 덕분에 텔레비전을 그냥 켜놓고 온 거 같다. 아니, 텔레비전보다 현관문이 더 문제다. 문을 열어젖힌 것은 생각이 나는데 닫았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잠그진 않았기에 도둑이 들면 어쩌지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가져갈 것도 없는데 도둑이 와도 뭘 가져가겠냐 하면서 괜한 호기가 솟았다. 할은 골목에서 벗어나 병원의 정문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잘 닦여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고급스러운 병원 내부와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보인다. 병원 밖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리포터들이 빼곡하고 몇 명의 사람들은 병원의 관계자들을 붙잡고 열심히 질문해대고 있다.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여보니 온통 고담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녀석의 병실 앞에서도 저렇게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 같다.
돌아갈까, 애초에 내가 여길 왜 온 거지. 병원에 오기 전에 생각했어야 하는 질문들에 답하려 할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동안 병원 앞에 모여 있던 기자들의 움직임이 요란해졌다. 유리 문 건너편에서 비싼 양복을 빼 입은 건실한 청년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다. 리처드 그레이슨이었다. 할은 순간 낯익은 얼굴이 반가워 무의식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가 내렸다. 기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것도 괜히 이상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많으니 제 행동을 알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리그에서 두어 번 마주쳤을 뿐이지 딕과 특별히 친하다거나 하는 관계도 아니었지 않은가. 할은 제가 손을 들었다가 내린 행동 자체가 머쓱해져 괜히 머리만 벅벅 긁었다. 이윽고 딕이 병원에서 나오자 기사들이 그를 둘러싸며 요란하게 질문을 해댔다. 카메라와 마이크로 얼굴을 칠 정도로 들이 대면서 하는 질문은 역시 브루스 웨인에 관련된 질문이다. 딕은 노련하게 웃었다. 훌륭한 의사 선생님들이 계셔서 괜찮다고 대답하며 한동안 격렬한 운동을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하는 그는 제 양아버지의 상태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미끄러지듯 나타난 자동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딕의 동작이 한편의 연극을 떠오르게 할 만큼 자연스러운 탓에 할은 정말 브루스 웨인의 몸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 자주 다치는 박쥐지만 워낙에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건지 제 오지랖을 탓하며 몸을 돌리려는 타이밍에 지문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비싼 자동차가 앞에 섰다. 썬팅된 창문이 내려가면서 나타난 얼굴은 방금 전까지 기자들 앞에서 서비스 미소를 짓고 있던 딕이었다. 할은 그가 자신을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한밤중에 배트맨을 만난 빌런처럼 놀라 허둥지둥 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던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그냥..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당황했을 때는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할은 반가운 듯 인사하는 딕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괜스레 힘들었다. 시계도 차지 않은 왼쪽 팔목을 두어 번 보다가 머리를 긁는 그를 보며 딕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웃었다.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제 양아버지와 너무 닮아있어서 실은 입양한 게 아니라 숨겨둔 자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나이 차이는 조금 설명하기가 어렵겠지만. 딕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며 웃더니 작은 메모장을 꺼내 끄적이다가 할에게 전해준다.
"18층이에요, 특실이라 엘리베이터가 달라요. 이 쪽지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한번 가주세요. 브루스가 좋아 할 거에요. "
할은 딱히 갈 생각은 없었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메모를 받았다. 브루스가 다친 탓에 자기가 몇 배로 바빠졌다고 투덜거리는 딕은 넉살좋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창문을 올리며 가버렸다. 딕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할은 그제야 메모의 내용을 확인했다. 브루스가 머무는 특실의 번호와 웨인가의 손님이니 들여보내달라는 간단한 메모가 리차드 그레이슨의 사인 위에 쓰여 있다. 엘리베이터가 다르다니 아예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원천봉쇄 해놨다며 혀를 차다가 어느새 흩어져 사라진 기자 떼를 떠올려보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인원들이 병실에 모조리 올라간다면 제 아무리 특실이라고 해도 복잡해질 것이다. 메모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딕의 말이 떠올라서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녀석이 좋아할 리가 없지. 내가 슈퍼맨도 아니고. 할은 순간 떠오른 커다랗고 친절한 강철의 사나이의 잔상에 괜히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떨구어 버리고 다시 메모에 집중했다. 그래도 한번 떠오른 찝찝한 기억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뜨거운 술과 밤, 그리고 차가운 침대의 그 감각이 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이 흔들리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자신은 굉장한 잘못을 저질렀다. 제가 한 일을 생각하면 그 박쥐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쫓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쫓겨도 할 말은 없다. 경찰에 신고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할은 딕이 건네준 쪽지를 잔뜩 구기며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그래도 솟아나는 미련에 메모를 다시 꺼냈다. 이대로 영원히 안 볼 것이 아닌데. 리그에서든 어디서든 부딪혀야 한다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우뚝 서서 메모에 시선을 고정한 할은 결심했다. 그 아들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한번은 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고담의 특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러 가자는 마음으로 할은 병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딕이 내려온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어디선가 까만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 제 앞을 막아서는데, 그에게 메모를 내밀었더니 갑자기 버튼까지 눌러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할은 뭔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8층으로 바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에선 제 몸을 내리누르는 중력과 저를 끌고 위로 향하는 힘이 충돌하는 탓인지 심장부근이 조금 울렁거렸다. 브루스의 병실을 찾아 복도를 걸으며 할은 이상하게 점점 제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무거움은 특실의 문을 열기 전에 절정에 이르러, 할은 정말 오랜만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느꼈다. 이대로 하늘로 솟구쳐 버릴까. 18층이니까 변신해서 사라져 버리면 아무도 저의 모습을 보지 못할 거라고 꽤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누군가의 세련된 응접실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깔끔한 병실의 한 가운데엔 침대가 있었고 그곳에 브루스 웨인이 있었다.
항상 시커먼 가면을 뒤집어쓰고 온 몸에는 시커먼 망토를 두르고 다녀서 햇빛을 못 받은 탓에 허여멀건 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주한 새하얀 얼굴과 몸은 제가 기억했던 것보다 더 파리했다. 몸에 감겨있는 붕대만큼, 아니 붕대보다 더 창백하게 느껴져서 할은 순간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생글거리며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인터뷰하던 그 아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어깨에서부터 상반신을 뒤덮고 있는 반창고와 붕대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왼쪽 팔에 달려있는 링거의 숫자는 왜 저렇게 여러 개인지. 고담의 귀족은 병실도 특별한 곳을 쓴다며 놀리려는 말은 제 의식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인기척에 그 연한 하늘색의 눈동자가 뜨여지는 것을 보는 순간 할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심한 목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끓는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그렇게 다쳤냐며 다그치고 싶은 속마음과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묻냐는 의식 충돌한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야말로 머릿속에 백지처럼 하얗게 물드는 와중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낮은 목소리가 웬일이냐며 묻는 것이 들렸다. 그것은 할이 기억하고 있던 그 목소리보다 무척 건조하고 무척 연약하게 들려서 문득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원한 통유리를 통해 내려다보는 고담은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와 건물로 빼곡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떠들고 그보다 더 커다란 소리로 자동차가 경적을 뿜고 브레이크를 밟는 요란한 도시와, 오로지 링거의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리는 특실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격리된 유리장벽으로 만들어진 세상 안에는 링거와 브루스 웨인과 자신만 존재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브루스 웨인은 어쩌면 마네킹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할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빠르게 떨어지는 링거액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누워계시는 일 중독자께서는 링거만 다 맞으면 다시 뱃 케이브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더랬다. 처음엔 바쁘게 할 일이 있다고 어디선가 문서들을 꺼내들고 읽으려고 하기도 했다. 다행히 마취제 때문에 금세 피곤해 하면서 눈을 끔뻑이길래 종이 구겨진다고 서류들을 그 손에서 치워냈다. 온 몸에 붕대를 감은 주제에 입은 살아가지고 내놓으라면서 꿍얼대는 박쥐의 말을, 냉장고에서 군것질 좀 하겠다는 핑계로 뒤적거리며 무시했다. 한숨 쉬는 소리는 곧 숨소리가 되어 다음 순간 돌아보니 조용히 눈을 감고 자고 있더라. 무방비한 저 모습을 지난 어느 날, 다른 장소에서 본적이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갈비뼈 아래쪽이 뻐근해졌다.
브루스 웨인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미디어를 요란하게 달구고 있었지만 그의 측근들과 배트맨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의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위한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이 자리를 지운 사이에도 리거들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고와 빌런들을 대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루스, 아니 배트맨은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빼오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곳에서의 폭발로 인해 크게 부상을 당했다.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은 할은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다른 놈들은 뭐하고 있었기에 이 민간인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맡긴 건가 싶기도 하다가 그때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에 짜증이 난다.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해킹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폭발이 있기 전에 그를 구출한다던가, 그의 곁에서 보호막을 치고 폭발에 휘말리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왜 쓸데없이 오아에 가서 괜히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는지 스스로를 탓하다가 그냥 입술만 꽉 깨물었다. 저는 잘못을 저지르고 그 결과가 무서워서 도망간 것 아닌가. 술김에, 아니 홧김에 일을 저지르고 책임지지는 않았다. 밀려오는 자책감에 숨 쉬기가 힘들었다. 누워있는 창백한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이 아니라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했어...미안하다.“
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말은 지나치게 늦었고 또 부족한 것이었다.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한 병실에서 그 낮은 목소리가 작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
할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인 할은 자신이 좁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다. 의자에 매달리듯이 겨우 상체를 일으킨 할이 이리 저리 문질러진 탓에 뻗친 뒷머리를 이리저리 문지른다. 그리고 그 꼴이 썩 멋있어 보이지 않았는지 어깨를 흔든 사람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던씨,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뭐...어쩌다보니...”
옆방에 있는 보호자용 침대에서 거기서 주무시지 그랬냐는 딕의 말에는 웃음이 잔뜩 섞여있다. 그런게 있으면 있다고 힌트 좀 주지, 힌트 하나 없던 박쥐의 아들이 야속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작게 주먹을 쥐고 제 뻐근한 허리를 두들기던 할은 딱히 자고 갈 생각은 없었다며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서류를 읽고 있는 브루스를 가리키며 일 중독자인 네 아버지나 말리라고 뭐라 하다가 그의 눈총을 받고서 슬며시 손을 내린다. 딕이 브루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 자신이 가져온 거라고 멋쩍게 웃는 것을 보며 할은 혀를 찼다. 저 일 중독은 집안 내력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브루스가 제 입양한 아들들까지 일중독자가 되도록 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화장실을 쓰겠다며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웬만하면 세수 좀 하고 나오라는 차갑고 재수 없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저 박쥐 놈은 변한 게 없다고 궁시렁 거리면서도 할은 비누를 집어 들었다.
특실은 역시 특실인 만큼 잘난 면이 있었다. 있는지 몰라서 할이 이용하지 못한 침실은 제쳐두고도 화장실은 샤워를 할 수 있는 샤워 부스와 스파가 가능해 보이는 욕조도 있었다. 대체 이건 왜 필요한 건가를 열심히 고민하던 할은 문득 제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거 같아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오아에서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병원에 온 것이나 다름없는 탓에 물을 펑펑 사용하며 샤워한지 꽤 지난 거 같다. 뜨끈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던 할은 에라 모르겠다며 제 옷을 훌훌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밤새 간호한 값 대신 샤워 한번이라면 엄청 싼 거 아니냐. 샤워 한번 정도는 특실 요금에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칠 거라 생각하며 할은 제 얼굴과 몸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슬쩍 눈을 감았다.
샤워를 한 뒤 기분이 좋아진 할은 바지와 셔츠를 걸치고도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느낌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바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 듯 딕은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어제만 해도 창백한 얼굴로 골골거리던 중환자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옷을 입고 있다. 셔츠 안쪽에 붕대를 애써 감추는 것을 본 할은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병원에 원수졌냐며 좀 더 누워있으라고 말하며 그가 꿰어 입은 셔츠를 벗기려다가 괜히 민망함에 헛기침하는 저를 본 브루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고집 세기로 유명한 박쥐는 그날따라 아파서 그런지 피곤한 건지는 몰라도 순순히 셔츠를 벗고 다시 환자복을 입었다. 물론 불만 가득한 얼굴인 데다가 딕이 두고 간 서류를 달라며 거만하게 손을 내밀기에 한 대만 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배트맨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웨인가의 변호사는 무서워해야지. 게다가 병원에서 환자를 때리면 윤리적으로도 어긋난다. 히어로가 그럴 순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한 할은 순순히 문서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제가 일어난 의자에 다시 조용히 앉았다. 기세 좋게 우겨서 환자를 침대에 다시 앉혀놓는 것 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에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탓이다. 어젯밤에도 곁에 있는 것이 전부였을 뿐, 링거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늦춘 게 간호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다시 조용해진 병실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가끔가다 짧은 손톱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몸에는 온통 붕대를 감았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일을 하는 그를 반쯤은 질린다는 얼굴로 또 나머지 반쯤은 걱정이 찬 얼굴로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길 세 번째. 할은 간질간질한 분위기도 아니고 숨 막히는 분위기도 아닌 그 미묘한 순간을 견디기가 힘들어 몸을 일으켰다. 제가 벗어둔 재킷을 다시 입으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가봐야겠다고 말하는데, 브루스는 그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정 없고 차가운 놈. 묘하게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한 할이 병실 문을 잡고 돌리려는데 갑자기 의외의 말이 들렸다. 밥이나 먹고 가라. 짧은 그 말에 할은 몸을 돌려 쳐다보는데 어째 그 말을 한 사람은 여전히 서류만 넘기고 있다. 또 그 모습이 그냥 얄미워서 일 생겼다며 튕기려는데, 초능력이 있는 게 틀림없는 그 박쥐가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며 없는 거 다 안다고 감정 없이 말한다. 순간 무안해졌다가 아무렇지 않게 문에 제 한쪽 팔을 기대어 본인이 생각하기에 멋진 포즈를 만든 할이 거들먹거린다.
“뭐야. 이 형이랑 그렇게 아침식사가 하고 싶어?”
“불쌍하다고 아침먹이고 보내란다. 딕이.”
“...”
할이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웃던 딕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음번 만났을 때 그린랜턴의 위엄을 보여줘야겠다고 이를 가는데 브루스가 몸을 일으킨다. 그가 옷걸이에 있는 코트를 집어 드는 것을 본 할은 잽싸게 다가가서 코트를 걸쳐주었다. 왼쪽 팔에 있는 링거를 슬쩍 쳐다보는 브루스가 혹시라도 줄이 귀찮다며 뽑아 버릴까봐 왼쪽의 링거를 끌고 브루스 곁으로 왔다. 다른 사람들은 링거 없으면 꾀병인줄 알거라며 놀렸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돌려 먼저 나간다. 할은 링거를 끌고 잽싸게 그를 따라갔다.
식사는 비교적 평화롭게 할 수 있었다. 병원의 상층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존재를 안 할이 더러운 부르주아의 병원이라며 브루스에게 시비 걸고, 그가 샐러드만 주문해서 먹는 것을 보고 제가 시킨 커다란 스테이크 덩어리를 그의 접시에 밀어 넣으며 다이어트 하냐고 놀린 것만 빼면. 다시 병실로 돌아와 와치타워에 가봐야 한다고 득득 우기는 브루스를 다시 침대에 앉힌 할이 그 대신 서류들을 마샨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할은 지 몸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자기들은 멀쩡한 외계인들과 초능력자들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냐는 볼멘소리를 내려다가 참았다. 마샨이 부탁하는 게 있으면 바로 전달해주겠다고 아주 굳게 약속을 하고나서야 브루스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마침 회진 온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그를 부탁한 할은 서류를 제 팔에 끼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뒤를 돌아 병실 안을 들여다봤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와치타워에 도착한 할은 브루스가 전해준 문서를 하나도 빠짐없이 마샨에게 전달했다. 마샨은 슈퍼맨과 회의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인사하는 빅 블루의 인사를 받아들이기가 껄끄러워 어정쩡하게 넘기고 말을 돌렸다. 마샨에게 꼭 입원환자에게까지 일을 시켜야 하겠냐고 궁시렁 거리자 그가 배트맨이 폭발에 휘말리면서까지 얻어낸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무슨 자료인지 열어보지도 않은 할은 그저 머리를 긁다가 적어도 일주일은 병원에 있어야 다시 그 어두침침한 망토자락을 볼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하자 슈퍼맨이 눈살을 찌푸렸다.
“브루스의 상태가 그렇게나 심각한 건가?”
“그 슈퍼비젼인가 뭔가 하는 걸로 한번 살펴보지 그래? 아주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고.”
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슈퍼맨은 브루스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상냥할 정도로 순진한 그 대답에 할은 이유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타인을 대할 때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것이 영웅이 가져야할 겸손함이라며 그를 칭찬했던 과거와 달리 한없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대체 이런 녀석을 왜 좋아하는 걸까. 어느 구석이 예쁘다고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하면서 푹 빠져있나 싶다. 정작 필요할 때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인데, 무지막지한 힘이랑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를 구해주지는 않아서 위험에 처하게 한 놈인데. 슈퍼맨을 바라보는 할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마샨이 심상치 않은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할을 말릴 수는 없었다.
“민간인을 적진으로 보냈으면, 보호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정보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우린 뭐, 소모품이냐? 저 정도여서 다행이지 아주 목이라도 날아갔으면? 배트맨은 그냥 인간이야. 너네 같은 외계인이 아니라!”
마샨이 할의 어깨를 가볍게 내리누르며 다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할은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튀어나온 제 본심을 있는 그대로 말했더니 짜증이 좀 가신 것 같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브루스가 다친 것은 이들의 탓이 아니다. 빌런들과의 싸움에서 계획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것은 브루스, 바로 배트맨이다. 또한 이들이 배트맨을 혼자 적진으로 보내는 등의 무모한 계획을 세울 리 없다. 혼자 해결하기 좋아하는 그 배트맨이 제 포지션을 정했을 거란 말이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놀랐던 것과, 병실에서 링거를 맞으며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낀 감정들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할이 분노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그는 폭발로 인해 죽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의 그 끔찍한 순간이 그와 자신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 지도 몰랐던 일이다. 할은 제가 분노해야할 방향이 그들이 아님에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며 컨트롤 룸을 나가는 할을, 누군가 따라 나왔다. 그리고 할은 그 인물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랜턴,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난 할 말 없어.”
슈퍼맨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이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나고 있는데다가 방금 전 할의 말 때문인지 미안한 기색까지 어우러져 마주하기 불편했다.
할은 인정했다. 사실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있는 것이 맞다. 특히 그에게 극도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배트맨이, 아니 브루스가 그에게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나서 그냥 그가 싫다. 싫어졌다. 사실 ‘그냥’이 아니지. 할은 브루스가 슈퍼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그가 싫어졌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슈퍼맨이 입을 열자마자 증폭되었다.
“미안하네. 그때 나는 다른 임무를 받아서 먼 우주에 나가있었어. 그래서 브루스를 지키지 못했고... 연락을 했을 때는 큰 부상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그를 지켰어야 하는데... 그가 그만큼 다친 건 내 책임이야.”
쾅!!
할이 제 오른손으로 거칠게 벽을 치는 바람에 슈퍼맨의 다음 말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놀란 얼굴의 슈퍼맨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주먹을 꼭 쥔 채 충동을 참아냈다. 제 입술 뒤까지 성큼 다가온 말을 겨우 삼켰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 녀석을 지키고 책임지고 한다는 건데. 마치 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한 그것이 싫다. 브루스에게 그가 특별한 사람인 게 싫고 그에게 브루스가 평범한 동료가 아니라는 것도 싫었다. 박쥐와 그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그저 평범한 동료의 관계이길 바랐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할은 아무런 말도 없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넌 필요 없어. 민간인 지키는 건 나로 충분하니까.”
아직도 당황스러운지, 얼떨떨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슈퍼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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