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숲뱃 배포전에서 판매되었던 숲뱃 엔솔의 글 일부입니다
공개가 가능해질때 전문을 다시 올리겠습니당
무려 1시간 하고도 30분 동안, 클락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니터 안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그의 모든 신경은 온통 연락 없는 상대에게 쏠려있었다. 바짝 말라붙은 입술만큼 클락의 속이 타들어간다. 대체 왜 답장을 해주지 않는 걸까. 워낙에 바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미 1시간 전에 했었다. 원래 과묵한 사람이라 메시지를 보고도 답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도 30분 전에 끝난 변명이었다. 그렇게 넘어가기엔 둘은 반드시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보낸 문자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싶어, 클락은 다시 제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내용은 명료하다고 할 만큼 짧았고 간단할 뿐이었다. 차라리 문자의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토록 기다리진 않았을 텐데. 애꿎은 핸드폰 화면만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았다. 얼룩덜룩했던 지문이 사라진 매끄러운 화면 위에 입 꼬리가 축 처진 자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여나 그에게 답장이 오지 않을까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보지만, 새카만 화면을 통해 마주치는 건 우울하고 어수룩해 보이는 기자의 눈뿐이었다.
클락이 보낸 메시지는 간략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와 얼굴을 맞대었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클락은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제 머리칼을 힘껏 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만 갔다. 결국 클락은 알아야 했다.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이기에 짤막한 답장조차 없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안경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클락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안경은 무겁고 두터웠다. 그것을 코에 걸치듯 살짝 내린 클락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는 제 앞의 시멘트벽을 노려보았다. 가을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시야를 가로 막은 수십 개의 벽들을 꿰뚫어 보았다. 아무리 많은 장애물들도 클락의 눈을 막을 수 없다. 수십 킬로나 떨어져 있는 그와의 거리도 그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클락의 눈은 어느새 그의 도시까지 닿았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분명한 케이브의 컴퓨터 앞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군데군데 납으로 가려져 볼 수 없는 부분의 동굴 곳곳을 훑은 다음에 그의 커다란 저택을 살핀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저택을 본 사람들 중에 몇몇은 그 모습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볍고 현대적인 젊은이인 그한테는 클래식한 건물보다는 투명한 유리와 독특한 색, 모양으로 꾸며진 현대식 건물이 더 잘 어울릴 거 같단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플레이보이인척 제 성격을 가볍게 꾸며대고 있지만 실제 성격은 그것과 매우 달랐다. 그는 진지하며 무거울 만치 진중한 성격에, 그의 부모님과 그들의 조상들이 지켜오던 것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것을 제 소명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이 고풍스럽고 오래된 저택은 그 무엇보다 그의 삶과 닮아있는 것이다. 그 밑에 위치한 깊고 깊은 비밀기지까지도 함께.
잠시 상념에 빠진 클락은 금세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의 행방을 찾는 일. 얼마나 바쁘기에 자신에게 연락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위험한 일에 처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 했다. 그에게 한참이나 연락을 받지 못해 생긴 초조함은 어느새 그에 대한 걱정으로 옮아간 지 오래였다. 감히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걱정하는 것이 연인의 맘 아니던가. 저택과 케이브에 그가 없다는 것에 조금 더 불안이 솟았다. 클락은 서둘러 그 외에 그가 있을 곳을 스캔하듯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락의 불안감은 손쉽게 해소되었다.
커다란 건물의 높은 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는 업무를 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검정 양복이 너무도 잘 어울려서, 클락의 심장에 붙어있던 불안이란 놈은 어느새 설렘으로 바뀌어 버렸다. 붉은 넥타이가 조이고 있는 하얀 셔츠 깃 위로 그의 창백한 목덜미가 보이고, 그 위로는 일자로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보였다. 윤곽이 멋진 그 뺨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고독의 요새가 있는 북극에서 볼 수 있는 빙하처럼 맑고 시린 눈동자가 있다.
그가 매우 안전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클락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걱정은 괜한 짓 일지 모른다. 그는 그 악명 높다는 고담을 지키는 다크 나이트이며 영웅들의 두뇌인, 누구보다 훌륭한 영웅인 것이다. 그런 그와 잠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다섯 살 박이 꼬마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려는 마음대로 멈춘다고 멈춰지지 않는 법. 더군다나 가학적일 정도로 스스로에게 채찍질 하는 성격 탓에 클락은 그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무사했고, 답장이 없었던 것은 클락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던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여자만 끼고 놀러 다니는 돈 많은 카사노바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그는 무척이나 일에 열성적인 사람이다. 직접적인 운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고 해도 기업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기부나 복지 사업은 빠짐없이 그의 손을 거친다.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내젓는 낙후된 지역에도 끊임없이 돈을 투자하는 그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만큼 그 도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도시, 그러니까 고담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때론 지나쳐, 그의 동료이자 연인인 클락에게도 질투를 유발할 정도이다. 그의 앞에서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지금처럼 저 잘생긴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온갖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 고담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질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도 모를 거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클락은 그의 연인에게 맞추어 시선을 내렸다. 그가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은 고담의 지도나 몇 개의 0이 따라붙은 엄청난 금액의 발전 기금으로 빼곡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클락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하얀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 몇 어절에 불과한 짤막한 메시지라는 것에 다시 놀랐고 그 내용의 친숙함 때문에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얘기 좀 해, 브루스.]
미간을 좁혀 주름을 만든 브루스가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던 것은 바로 클락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에 가슴 한 구석에서 뭉클한 것을 느꼈다. 어쩌면 브루스도 자신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너무 일이 바빠서 메시지가 온 줄도 몰랐지만 그도 클락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제 브루스가 답장을 보낼 것이다. 답장이 오면 곧바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브루스는 버튼을 눌러 클락의 메시지가 떠 있는 화면을 껐다. 답장을 보내줄 거라 믿었던 클락을 당황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주머니에 핸드폰을 밀어 넣어버리는 브루스의 손놀림은 침착하다 못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 행동을 본 클락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어째서 답장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브루스와 그의 사이를 가리는 벽들이 사방에서 시커멓고 솟아나고, 느릿하게 돌아온 클락의 시야에 보인 것은 작은 커서만이 깜빡이는 빈 컴퓨터 화면이었다. 브루스의 행동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의 한숨소리가 귓가에 건조하게 말라붙는다. 클락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 손을 느리게 뻗어, 아까보다 더 세게 자신의 머리칼을 뭉갰다. 이제는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것을 인정할 순간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의 연락을 피하고 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브루스가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걸까. 짐작도 가지 않는 그 이유를 떠올리기 위해 클락은 제 머릿속을 쥐어짰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브루스와 마지막 데이트의 장면 뿐. 도망치듯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그 날의 데이트는, 사실 무척이나 로맨틱하고 달콤한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클락은 믿었고, 또 기대했었다. 그리고 브루스도 그것을 바란다고 여겼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클락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클락과 브루스가 서로 알게 지낸 사이는 벌써 3년. 처음엔 기자와 고담의 백만장자가 아닌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만났다. 망토를 두른 영웅으로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동료가 되고, 리그를 결성하여 지겹게 얼굴을 마주하다보니 어느새 서로의 정체까지 알게 되었다. 까칠하고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 수상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순식간에 세상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친우로 바뀌었고, 언제부턴가 그를 향한 감정은 우정보다도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변해갔다. 그에게 그 감정을 들킬까봐 발을 동동 거리며 걱정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 케이브까지 날아가 이유 없이 미적대던 것도 벌써 과거의 일.
4개월 전에, 클락과 브루스의 관계는 큰 진전을 보였다. 클락은 리그에서 빌런을 막다가 큰 부상을 입게 되어, 며칠 동안이나 리그의 병실에 꼼짝없이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살면서 몇 번 겪어보지 못한 통증 속에서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을 곁을 지키고 있는 브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클락은 숨겨왔던 감정을 모두 고백해버렸다.
어쩌면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외계인 전용 마취약 덕분에, 반쯤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여서 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클락은 고백을 했고, 브루스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제 앞에서 사라졌었다. 고백을 들은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클락은 자신의 입을 때려주고 싶었다. 비록 링거와 붕대로 칭칭 감긴 팔과 가슴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브루스에게는 마취약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이었다고 둘러대는 것이 나을지, 빌런들에게 맞은 충격으로 머리가 조금 이상해졌다고 변명하는 것이 괜찮을지 며칠이나 고민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제 앞에 나타난 브루스는 예상외의 대답을 가져 왔다. 승낙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먹던 죽을 환자복에 쏟아버린 거나, 병실에 다이애나가 있는 상태에서 그를 끌어안아서 그에게 혼쭐이 났다는 것은 둘째 치고. 그렇게 클락과 브루스는 사귀게 되었다. 생각 외로 순조로운 그 과정이 믿기지 않아, 잠을 자다가도 그의 저택이며 케이브에 쫓아가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 받기도 했다. 그렇게 연인이 된지 4개월이 지났다. 둘이 있을 때 그들의 대화나 행동은 조금 더 사적인 냄새를 풍겼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가락을 얽고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밤바람에 차가워진 입술을 체온으로 데워주는 그런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클락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음흉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클락은 브루스를 좀 더 만지고 싶었고, 그와의 더 깊은 교감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브루스는 지금까지 클락이 해오는 스킨십을 거절해온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그 날’의 데이트는, 다분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데이트였다.
도시의 치안을 위해 좀처럼 밤에 시간을 낼 수 없는 그를 배려해 데이트는 낮에 진행되었다. 장소는 오붓하게 둘만 있을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에 위치한 클락의 아파트. 브루스가 오기로 한 며칠 전부터 클락은 온 집을 들쑤셔 놓았다. 아파트에 이사 온 뒤로 그렇게 청소를 살뜰히 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침대보며 베갯잇을 새하얗게 될 정도로 세탁하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냉장고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브루스에게 식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신선한 재료를 사오고, 틈틈이 집어 먹을 수 있는 군것질거리와 가벼운 도수의 알콜이 들은 음료도 준비했다. 푸근한 소파에 앉아 둘이 함께 볼 영화는 며칠을 고민해서 겨우 골랐고, 거실의 커다란 창문에는 환한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두툼한 커튼을 사서 달아 놓기까지 했다.
브루스와의 데이트를 위해 제 집을 열심히 꾸미고 정리하면서, 클락은 문득 자신이 짝을 유혹하기 위해 둥지를 짓고 꾸미는 새가 된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크게 틀린 비유가 아니었다. 어쨌든 간에 클락은 고담의 ‘그 브루스 웨인’을 유혹해야 한다는, 상당히 수준 높은 과제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래서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사온 브루스가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클락은 입술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했었다. 그러나 클락이 멋지게 요리를 만들어내고, 브루스가 그것을 가볍게 칭찬한 것을 기점으로 긴장은 점점 휘발되어 갔다.
식사 후 영화를 보면서 분위기는 정점을 찍었다. 영화가 맘에 들었는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브루스에게 시원한 맥주를 내밀자, 그가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아주 잠시 닿은 손가락에서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그에 탄력을 받아 클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낵을 집는 손 위에 클락이 슬그머니 손을 올려도 브루스는 피하지 않는다. 작게 체온이 느껴지는 손가락이 겹쳐져 있다는 사실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클락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하고선 브루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클락의 손에 갇힌 브루스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움직이는 바람에 겨우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엔, 저에게 바짝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정신없이 뛰는 통에, 왜 영화에 집중을 못하냐고 묻는 브루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저를 놀리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한 그 매력적인 미소가 브루스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것과, 그의 턱을 붙잡은 클락이 브루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기 좋게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벌려지고, 말랑하고도 촉촉하게 젖은 혀가 순식간에 닿았다. 그 혀는 분명 지독하게 야한 붉은 색일 테지만, 아쉽게도 클락은 볼 수 없었다. 브루스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고 그 곳에 자신의 살덩이를 밀어 넣어, 작은 열기가 느껴지는 그의 안쪽을 샅샅이 훑는 것으로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연결되어 있는 입을 통해서 클락에게까지 전해지는 짤막한 숨소리가 무척 달콤했다. 난폭하다싶을 정도로 다급하게 달려드는 클락때문에, 브루스는 몸을 조금 젖혔고 클락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는 브루스의 가슴팍에 자신의 몸을 바짝 붙이며 그를 압박하자, 소파와 클락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대신 움직일 수 있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클락의 목덜미를 슬며시 문질러주는데, 그 끈적하고 애정 어린 그 애무에 클락은 단단하게 흥분해버렸다.
브루스에게 조금 더 밀착하며 기대자, 두 사람 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그의 몸이 그대로 미끄러져 소파에 눕는 꼴이 되었다. 어느새 클락은 브루스의 양 다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밀착한 몸에선 가슴팍이 오르내리며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굳이 손을 가져다댄다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서로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클락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진한 입맞춤으로 인해 잔뜩 상기된 브루스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죽을 만큼 섹시했고, 시리게 반짝이던 그의 눈빛에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욕정이 이글댔다. 게다가 클락의 목덜미에 닿아있던 손가락은 이제 그의 귓바퀴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지독하게 은밀하고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소파 곁의 서랍에 넣어둔 콘돔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클락이 브루스와 맞닿은 부분을 슬쩍 문질렀을 때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바닥으로 추락한 엉덩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브루스의 얼굴이 제게서 멀어진 것을 멀거니 보고 있던 클락은 그제야 자신이 소파 바깥으로 밀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파에 반쯤 누워있는 브루스가, 목덜미며 귀를 문질러 저의 정신을 쏙 빼놓던 그 손으로, 자신을 저 멀리 내쳐버렸다.
후끈후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자신을 내쳐버린 의도를 알 수 없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클락을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에도 놀람이 한 가득이라, 그 둘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만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브루스가 바쁜 일이 생겼다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 엉거주춤 일어난 클락은 브루스를 따라 나가며 대체 무슨 일이냐며 이유를 물었지만, 브루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재킷을 손에 들고 도망치듯 클락의 집에서 빠져나가며, 미안하다고 말한 작은 소리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후로 사흘째. 클락은 브루스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이틀 전에 리그에서 회의가 있어 와치 타워에서 잠시 만났었지만,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안부 인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는 혹시 브루스가 자신을 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저 기우이길 바랐다. 그리고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었다. 브루스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 명백하게.
지금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 그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자신의 연락을 한숨 쉬며 피한 연인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갑자기 날아갔다가 이제는 만나는 것까지 거절당할까봐, 얼굴도 보기 싫고 자신이 싫어졌으니 헤어지자고 말해 버릴까봐 차마 찾아갈 수가 없었다. 클락과 브루스는 분명 만나야 한다. 그러나 브루스가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만난다면, 분명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한참이나 고민했지만 우울한 기분 때문인지 좋은 생각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몇 시간 째 브루스에 대한 고민을 했더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릿속에서는 불행했던 그 장면만이 떠오른다. 저를 밀어내고 놀란 얼굴을 하던 브루스의 얼굴. 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한 걸까. 이토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면, 클락은 그때 브루스를 그렇게 놓쳐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팔을 붙잡고 제게 말해줄때까지 곁에 붙어있었을 텐데.
어깨를 축 내리고 한 글자도 작성되지 않은 문서 파일만 멍하게 보고 있으려는데, 클락의 귀를 번뜩이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장실에서 아주 작게 들리는 로이스의 말이었다.
“오늘 저녁에 열리는 자선파티 말씀이죠? 고담의 브루스 웨인을 비롯해서 돈 좀 있다하는 사람들은 죄다 초대 명부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저도 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미 잡아놓은 인터뷰가...”
“그래도 자네가 아니면 그런 자리에 누가 간단 말인가? 인터뷰는...”
“제가, 제가 갈게요! 국장님!”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클락의 모습에 페리와 로이스 모두 놀란 눈치였다. 클락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불쌍한 얼굴로 애원해 페리에게 자선파티의 초대 명부와 초대장을 받아내었다.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이동해 허둥지둥 짐을 챙겨 넣은 클락은, 재빠르게 초대 명부를 훑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 중에서도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눈에 띄었다. 브루스 웨인의 이름 옆에 직접 방문한다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브루스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최적의 만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침을 한번 삼키고, 클락은 나머지 필요한 것들을 가방에 우겨넣었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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