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디온 뒷풀이 리퀘입니다 / AU클락브루스, 대인기피증 브루스입니다
건조한 손끝으로 딱딱하고 차가운 철 재질의 뚜껑을 열어젖히자 냄새조차 희미할 정도로밖에 남지 않은 가루가 공기 중에 뿌옇게 퍼졌다. 이 통이 아니던가 싶은 맘에 뚜껑을 돌려 상표를 확인해본다. 그림으로 봐서 분명 핫초코를 만들 수 있는 가루가 담겨진 통이 틀림없었다. 비록 지금은 한 모금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가루만 남았지만. 긴 손가락을 뻗어 통의 바닥을 훑었다. 지문에 달라붙은 갈색 가루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달콤하고 씁쓸한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다가 사라지고 만다. 냄새조차 제대로 맡을 수 없을 정도로 턱없이 적은 양이다. 브루스는 부엌에 걸린 시계의 짧은 바늘이 오후 7시 너머를 가리키는 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끝장이다. 이번에야 말로 끝장이라고.
브루스 웨인은 소설 작가였다. 치밀한 사건 전개가 돋보이는 심리 소설로 등단하여 날카롭게 세상을 재단하는 듯한 문체로 유명해져서, 젊은 나이에도 이름 있는 상을 몇 개씩이나 거머쥔 유명 작가. 그러나 그는 어떤 시상식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혹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졌고 누군가는 그가 남자의 필명을 쓰는 여성이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어떤 사람은 소설의 신비로움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중에 어느 것도 진실에 해당하지 않았다.
사실 브루스 웨인이 시상의 현장에 나간다면 충분히 화제성을 불러 모으고도 남을 만큼, 그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 커다란 키와 타고난 체격, 남자다우면서도 섬세하게 빚어진 콧날과 우수에 찬 눈동자는 굳이 시상식이 아니라 평범한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한번쯤 뒤돌아보고 싶을 외모였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외모마저 타고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격이라, 인터뷰와 TV 프로그램에 초정한 사람들만으로도 줄을 세워야 할 지경이 될 거다. 그라면 며칠 만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유명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기를, 그래서 조용히 사는 것만을 바랐다. 그는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질병을 앓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예전에 찾아간 병원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격한 트라우마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브루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고 그것을 받을 때 몹시 불안해하며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치기 위한 심리치료와 약물 치료를 해봤지만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의 주치의인 레슬리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브루스를 키워준 알프레드도 그것에 동의했다. 그들은 브루스가 괴로워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억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치료를 강제하다보면 스스로에게 잘못을 돌리며 더욱 심각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들은 브루스의 질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가 원하는 삶을 편안하게 영위하길 바랐다.
덕분에 브루스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남이 필요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은둔 혹은 칩거라고 할 수 있는 삶이었지만 브루스에게는 충분한 넓이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가끔씩은, 어쩔 수 없이 집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가령 제 가족인 에이스를 위한 산책과 같은.
에이스는 몇 년 전, 알프레드가 그에게 선물한 가족이었다. 성년이 되고서부터 독립하여 혼자 살기로 한 그를 걱정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대형견 중에서도 큰 몸집을 자랑하는 그레이트 데인을 고를 이유가 없다. 어쨌든 까맣고 반질반질한 털의 에이스는 무척이나 영리하고 사랑스러웠다. 브루스가 가장 아끼는 친구가 된 에이스로 인해 브루스의 삶에도 조금 변화가 찾아왔다. 집이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개체의 특성상, 에이스에게 하루 종일 답답한 집안에 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기에 하루에 한 번씩은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덕분에 외출을 하지 않고 몇날 며칠을 살아가던 브루스가 매일같이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맨 처음엔 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끼고 공원을 향했다. 그 덕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누군가가 부른 경찰차가 브루스를 따라오기도 했다. 에이스를 몇 년이나 키워온 지금이야 그 정도로 수상하게 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가 결코 외출을 즐기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조금 요령이 생겼을 뿐. 사람이 드문 늦은 저녁시간을 택해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가는 식으로 말이다. 그마저도 브루스에게는 많은 노력과 긴장을 자아내는 지라, 그는 산책에 나가기 전과 산책에 다녀온 후에 꼭 커다란 컵 가득 뜨거운 핫초코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따뜻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 있으면 사람들이 있는 거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브루스의 긴장이 마시멜로우 덩어리처럼 녹아 내렸다. 힘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넘길 수 있도록, 어린 시절 브루스를 위해 만들어준 알프레드의 핫초코가 쭉 그를 지켜주고 있던 것이다. 브루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알프레드는 아직도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고 혀를 찼고, 레슬리는 그냥 웃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핫초코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브루스는 그 말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부정하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 순간을 흘려보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을리가 없고, 만약 있다 해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레슬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신기하게도 브루스는 정말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주 우연히, 그러나 마치 운명이었던 것 마냥.
그날도 에이스를 산책시키기 위해 브루스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마감이 일찍 끝난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 밖으로 나갔다는 것과, 마스크를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근처에서 열렸던 행사의 영향으로 공원에는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인파가 몰려있었다. 브루스가 공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공원의 반 이상을 거닐었을 즈음이었고, 그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게 된 것이다.
속삭이는 말소리며, 사람들끼리 나누는 시선이 날카롭게 브루스의 몸에 꽂히는 것 같아, 그는 그 한복판에서 어쩔 줄 몰랐다. 에이스의 목줄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잔뜩 쥐고서,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로 향한 곳은 공사 중인 공원 화장실 뒤편이었다. 건물 뒤편에 몸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브루스는 한참이나 숨어 있어야했다. 순식간에 돋아난 식은땀이 옷 안쪽, 목덜미를 타고 길게 흐르고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몸을 있는 힘껏 웅크렸다. 숨이 가쁘고 눈앞이 흔들리는 탓에 몸을 웅크리고 두 눈을 감은채로 브루스는 제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속이 뒤집어져 구역질이 나는 것을 견디느라, 브루스는 에이스가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들보들한 촉감의 털이 제 품을 다시 파고들 때는, 커다랗고 상냥한 체온을 가진 또 다른 존재와 함께였다. 그는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브루스의 몸을 감싸 진정시키며 느린 동작으로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제 괜찮다고, 등을 도닥일 때마다 귓가에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떨림이 서서히 멎어갔다. 브루스는 제 등에 닿아있는 그 체온에 몸을 맡기고 고통 속에서 주룩주룩 흘리던 눈물을 말렸다. 등에 닿은 손바닥에서부터 몸이 천천히 이완되어 가는 것이, 뜨거운 핫초코로 가득한 잔을 비운 기분이었다. 그렇게 브루스는 클락 켄트를 만났다.
그날 브루스는 무사히 귀가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클락의 따뜻한 성격은 폐쇄적인 브루스의 마음마저 녹여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클락으로 인해 브루스의 삶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 더 이상 에이스를 산책시키러 나가기 전에 핫초코를 들이키지 않았고, 밖에 나갈 때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어졌다. 클락이, 언제나 함께 했기 때문이다.
클락은 그가 버거워하는 시선을 모두 가려주었고, 긴장으로 몸을 떨 때는 포근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덕분에 둘이 함께하는 산책은 시간이 길어졌고, 더 멀리까지 걸을 수 있었다. 주인을 닮아 다른 사람을 따를 줄 모르던 에이스마저 클락에겐 꼬리를 치며 애교를 부렸다. 브루스는 클락을 따라 근처 마트를 방문해서 직접 물건을 사기도 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알프레드는 몹시 기뻐하며 클락을 칭찬했다. 몹시 고맙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브루스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락의 덕분에 단조롭고 작았던 세계가 무서울 정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고, 그와 함께라면 조금은 느려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무척 고마운 사람이라는 사실과 벌개로, 충돌을 막을 순 없었다. 사실 충돌이라기엔 일방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브루스에게서 시작되곤 했다. 마감이 다가오면 브루스는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변해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심할 때는 에이스를 알프레드나 레슬리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다. 클락을 만나고 정신이 곤두서는 것이 완화되었지만 예민한 성격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로인해, 오늘 일이 터졌다.
만들고 있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아 브루스는 며칠 동안 압박에 시달렸다. 편집자는 브루스를 알기에 눈에 띄게 독촉해오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제 성격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글을 창작하는 데에 있어서 그는 실로 완벽주의였기에, 몇 번이고 글을 뒤엎으며 밤을 샜다. 몸과 정신의 피곤은 알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고, 그것을 감당하기엔 스스로도 벅찼다. 결국 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응원해주며 묵묵히 도와주는 클락에게 화풀이를 해버렸다.
들릴 일 없었던 날카로운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워, 에이스는 그 커다란 몸집으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제 분을 못 이긴 브루스가 식탁을 내리진 탓에, 심하게 흔들린 책상 위에 있던 머그컵이 깨지기도 했다. 브루스가, 몹시 아끼던 것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클락은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오전9시. 아마 그대로 그는 출근을 했을 것이다.
클락의 모습이 현관문 건너로 사라짐과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사라져버렸다. 애초에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에 대한 분노와 화는 허상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울분을 그에게 풀어버렸다고, 브루스는 멀거니 혼자 서 있는 문을 보고 깨달았다. 쥐죽은 듯 조용한 집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브루스의 시선은 현관문과 시계를 정신없이 오갔다. 날카로운 분위기에 몸을 피해있던 에이스가 슬쩍 다가와 발치에 누워, 밥을 챙겨준 것이 점심때였다. 에이스를 쓰다듬어 주며 휴대폰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다. 혹시나 그의 연락을 놓칠까봐 버튼을 눌러 벨소리가 울리도록 바꾼다. 부질없는 일이 없길 바라며 브루스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그 후, 숨을 죽이고 집중한 덕에 며칠이나 브루스를 괴롭히던 글의 전개가 겨우 풀리고 겨우 끝을 본 것이 오후 4시. 바람이 지나간 파도처럼 잔잔해진 머릿속으로 클락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되새겼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며 다시 일에 빠져들었다. 오타와 비문을 수정하며 간단하게 퇴고를 하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더니 6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클락의 평균 퇴근 시간은 5시. 그의 직장에서 브루스의 집까지는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저녁을 항상 같이 먹는 둘이기 때문에, 클락이 6시를 넘겨 들어온 적은 손에 꼽는다. 물론 야근이 있으면 조금 늦어지곤 했지만, 클락의 야근 스케줄은 달력에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고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
많이 화가 난 걸까.
몇 시간 전부터 브루스의 머릿속에 있던 두려움이 제 몸을 점점 구체화한다.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여도 클락은 그에게 목소리 한 번 높인 적이 없었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랬듯이, 고통스러워하는 낯선 사람을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착한 사람. 그러니까 브루스와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다. 평범한 사람이 누리는 일상을 불안해하고 어려워하는 브루스 때문에 클락은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했다.
둘은 퇴근 후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 들러 인기 많은 음료를 마시는 것과 같은 평범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집 밖의 활동이 어려운 브루스를 위해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대신 처리하느라 주말을 반납해야 했던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맥주를 부딪치는 일, 새로 나온 영화를 보기위해 팝콘을 사들고 극장에 뛰어 들어가는 일, 바다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 모두, 브루스의 성향 때문에 경험하지 못했다. 작은 세계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브루스 때문에 클락까지 그 좁은 공간에 갇혀버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클락은 미친 듯이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에도 집에 있는 브루스에게 우산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에 빠졌다 나온 사람 모양에 놀란 브루스 앞에서, 그저 멋쩍게 웃으며 안경을 닦아낼 뿐. 클락은 자신의 세상을 넓혀주는데, 브루스는 자기가 그를 갈수록 좁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비단 오늘의 싸움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브루스는 클락을 좁은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클락이 그것에 지쳐간다면.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
클락은 지금까지의 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브루스의 곁에서, 그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던 시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맘에 끝없이 배려해준 자신에게까지 소리치고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대로, 다시는 브루스에게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나지막하게 전진하는 초침과 분침 이외에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는 시간들이 끔찍하게 적막했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이 났다. 그것이 꼭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집은 언제나 브루스에게 완벽한 안식처였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답답했다. 브루스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트북과 흐트러진 책이 가득한 책상, 식탁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에이스, 손에 들고 있는 빈 통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핫초코 냄새가 난다. 브루스는 빈 통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달콤하고 따뜻한 향기가 자기를 감싸줘야 했다. 긴장과 불안이 마시멜로우처럼 녹아들게 해야 했다. 그러나 어렴풋한 단내는 더 이상 브루스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불안이 밀려왔다.
목에서부터 숨이 턱턱 막혀서, 침대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고개는 연신 문으로 향했다. 저 문 밖에, 클락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브루스는 집 밖으로 나가 그를 찾아야 했다. 클락 없이 혼자 집 밖을 나선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라, 가만히 서 있는데도 다리가 벌벌 떨렸다.
브루스는 다시 한 번 미련을 가지고 손에 든 통을 바라보았다. 가루의 흔적이 묻은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부드러운 갈색의 가루가 손가락에 묻어나자, 그대로 들어 혀에 문질렀다. 너무 양이 적어 달콤하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맛이 조금 났다. 역시나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루스는 나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현관 옆에 걸린 클락의 겉옷 하나를 꺼내 둘렀다. 푸근한 그의 체취가 나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옷을 걸치는 그의 다리 아래서 에이스가 목줄을 물고 알짱거린다. 까만 눈에 담긴 상냥함과 기대가 미안해서 한번 끌어안았다.
“미안해, 지금은 산책이 아니야. 클락을 찾아올게.”
클락을 찾아서. 좁은 세계에 그를 가두려 한 것을 사과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해준 것에 감사를 표할 것이다. 함께 있으면서 조금씩, 더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약속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소리 지른 것에 대해서 사과할거다.
차가운 손잡이를 잡았다.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에서는 쇠 비린내가 날 것이다. 발이 마냥 무거웠다. 그래도 지금 나가야 한다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자신의 기준에서의 외출 준비가 한참이나 부족한 상태이긴 했다. 그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핫초코를 마시지 못했다. 아직은 바깥을 돌아다니기 좋은 저녁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는 옷 방에 있지만 그것을 꺼내서 한가롭게 쓰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브루스를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게 해주는 징크스들이 모두 하나씩 어긋났지만 그런 것 따위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손에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린다. 생각보다 문이 가볍다고, 몹시 부드럽게 열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브루스?”
안경 너머로 파란 우주 같은 눈을 한 그가 있었다. 아침과 똑같은 옷차림이었지만 왼손에 마트의 로고가 적힌 커다란 종이봉투를 끌어안았다. 약간 늘어진 입구를 통해 그 안에 가득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어제 보니까 통이 비어있어서 오늘 사러 갔는데... 근처의 마트에서 모두 품절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좀 멀리까지 다녀왔어.”
핫초코 가루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브루스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알았다. 클락은 손도 대지 않아서 제가 다 먹어치우는 그 가루의 유무를 파악하고 부지런히 채워오던 것도 역시 클락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제 정말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루스는 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없다. 그 앞에 마주 선 클락만 마음이 급해진다. 열심히 안고 온 짐을 거의 내동댕이치듯이 대충 떨어뜨리고, 클락이 브루스를 끌어안는다. 흐트러진 종이봉투에서 깡, 소리가 나며 통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둘 중에 누구도 집어 올릴 생각이 없었다. 브루스는 소리 없이 클락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아직도 속이 많이 상했어? 미안해. 많이 힘들었지? 아침부터 화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아끼던 컵이 깨진 것도...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응?”
품 안이 포근했다. 클락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브루스를 꽉 끌어안고 연신 등과, 어깨,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서 뜀박질하듯 급했던 브루스의 맥박이 정상궤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손길, 클락은 이 때문에 좁디좁은 브루스의 시계로 들어와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한다. 진정으로 그를 생각한다면,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손이 너무 따뜻했다. 그 품은 너무 따뜻하고 달아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코 가루를 다 마신 다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통의 뚜껑이 열렸는지 발밑이 온통 초콜릿 가루투성이다. 공기마저 달콤한 그곳에서 클락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fin-
-비정상적인 브루스가 좋습니다 클락에게 한없이 의존적인 브루스가 쓰고 싶어서 AU...
-9월까지 였는데 늦어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ㅠㅠ
-대인공포증 브루스를 쓰다가 어카운턴트 크리스찬 울프에게 치여서< 원작이 다 해주네 하고 쓰던걸 중단할까 하다가...더 이상 리퀘를 늦으면 너무 죄송해서 부족하게나마 완결지어 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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