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뒷풀이 사다리 리퀘였습니다
딕->뱃 요소 있습니다
"전체 요리 전에 준비한 아뮤즈 부슈입니다. 먹물 파스타와 노말 파스타를 올리브유와 야채로 장식한 요리로, 가볍고 깔끔하게 즐기실 수 잇도록 준비했습니다. 전체 요리로 드실 음식은 에스카베체입니다. 기름기가 많은 생선을 지중해식으로 조리하고 식초에 절였습니다. 함께 나온 마스카포네 치즈와 야채 구이를 곁들여 드시면 한층 더 향긋한 풍미가 느껴지실 겁니다."
난생 처음 보는 이름과 생김새를 달고 있는 요리를 포크로 조심스럽게 찌르던 빌리 뱃슨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려다본 것이 아니라 그대로 마주본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빌리는 샤잠이었기에, 제 앞에 앉아있는 남성과 눈높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 앞에 앉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솜씨로 우아하게 나이프를 놀리고 있는,
"음식이 맘에 들지 않으시나요?"
"아, 아니에요. 무척 맛있습니다...웨인씨."
바로 브루스 웨인을.
'그 브루스 웨인'과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될 순간이 올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최고로 돈 많고 섹시한 남자로 꼽히는 브루스 웨인과 가진 것 없는 고아 소년인 빌리 뱃슨과의 접점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조금도 없었다. 같은 대륙에서 살아가는 것을 공통점으로 두어야 할까. 아니면 그 브루스 웨인도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잃었다는 사실을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기는 것이 나을까. 실제로 브루스 웨인은 각종 고아원과 보육 시설에 많은 후원을 하고 있었다. 본인이 고아였기 때문에 다른 고아들에게 연민을 베푸는 것이라고 어른들이 떠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경우라면 '가난한 소년과 함께 하는 브루스 웨인의 한 끼의 자선 식사'와 같은 경우로 한 번은 만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상황은 그런 경우와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는 것이 독특했다. 지금의 빌리는 가난하고 어린 소년이 아니라, 마법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샤잠이었으니까.
포셋 시티의 수호자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샤잠이 고담의 부호 브루스 웨인을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일까. 장담하건데, 굉장히 낮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넓은 미국 땅에 훌륭한 영웅들은 몇이나 있으며, 특히 그가 사는 동네인 고담에는 전설처럼 존재해온 배트맨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빌리는 '배트맨'이 그저 옛날이야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인 줄 알았다. 실제로 배트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무척이나 최근의 일이었다. 샤잠이라는 영웅으로 인정받아, 저스티스 리그에 들어가게 된 것이 불과 한 달 전의 일. 리그에 들어가고 나서야 실재하는 영웅이며 심지어 메타휴먼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빌리는 그가 사실 밝혀지지 않은 메타휴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같은 리그에 있다 하더라도 샤잠은 아직까지 배트맨과 단 둘이 얘기를 나누어 본 기억조차 없었다. 망설일 것 없고 거침없는 샤잠의 친화력에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무서운 존재감 때문에, 그 앞에서는 이상하게 교장실 앞을 지나는 꼬마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트맨과의 협업이라든지, 그의 도시인 고담에 놀러간다든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슈퍼맨과 원더우먼 같은 다른 영웅들에게도 고담은 일종의 금지구역과도 같은 존재라 들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브루스 웨인과 샤잠은 좀처럼 접점이 없는 관계이며 이렇게 둘이 서로 마주 앉아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엄청나게도 신비한 일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누가 '그 브루스 웨인'이 고대 러시아 유물에 관심이 있어 멀리 포셋 시티까지 행차할 거라고 생각했겠냐는 말이다.
샤잠과 브루스 웨인의 만남은 포셋시티의 박물관에서 일어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물을 구경하기 위해 포셋 시티의 박물관에 온 브루스 웨인이 러시아 유물을 훔쳐가려던 빌런과 맞닥뜨렸고, 빌런들의 인질이 되어 그들의 앞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다가 샤잠에게 구해졌다. 빌런들 품에서 구해져 샤잠에게 반쯤 안긴 그가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내뱉는 인사치례라고 생각했다. 자기 품에 안겨 있는 그 사람이 브루스 웨인인 줄 누가 알았겠냐는 말이다. 솔로몬도 그건 몰랐을 거다. 각종 건물에 붙어 있는 웨인 마크는 알았지만 실제로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샤잠은 그의 말에 웃으며 감사하다는 소리로 넘기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포셋 시티의 최고급 레스토랑에 앉아있었다. 심지어 코스튬 차림으로. 저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얼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샤잠을 본 브루스 웨인의 '영웅께서 불편해 하시는 것 같다'는 한 마디에 순식간에 홀 전체가 비워졌다. 그 많던 사람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인지 이것이야 말로 마법의 힘이 아닐까 고민하는 샤잠 앞으로 음료와 요리들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의 음식들 앞에 샤잠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져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은혜를 갚겠다는 사람을 뿌리치고 열심히 차려진 음식들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법. 영웅이라면 이런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샤잠은 솜씨 좋게 나이프를 움직이던 브루스 웨인의 손놀림을 연신 흘깃대면서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샤잠은 조심스럽게 생선을 잘라냈다. 브루스 웨인이 했던 손놀림과 최대한 비슷하게 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워서 생선의 살이 반 이상은 뭉그러지고야 말았다. 서툰 포크질로 부스러진 살들을 입에 넣었다. 녹아내릴 것처럼 혀끝에 부드럽게 닿아오는 생선살은 비리지 않고 간이 잘 되어 있었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입맛에도 굉장히 맛있었다. 의외의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자, 브루스 웨인이 낮게 웃는다. 자신이 그렇게 이상한 얼굴을 했나 싶어 부끄러워지려는데 그가 곁에 있는 접시도 밀어준다.
"이것도 꽤 괜찮답니다. 드셔보세요."
손길은 우아하고 목소리는 부드럽다. 하늘빛을 닮은 연한 눈빛이 누그러지며 다정하게 웃는다. 남자다운 입술이 높은 콧대 아래로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본 샤잠은 그의 타이틀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섹시한...
까닭 없이 귓불이 달아올라, 샤잠은 서둘러 그가 내민 접시의 요리를 포크로 찔렀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면 그 시린 눈동자는 붉어진 자신의 붉은 얼굴을 봐버릴 지도 모른다. 저절로 숙여지는 샤잠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쳐다보는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는 작은 반응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있었다.
+ (사족)
와인 잔을 빙글 돌리자 동그란 유리를 따라 붉은 음료가 찰랑거렸다. 보르도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샤또 마고는 그 뛰어난 명성에 걸맞을 종도로 단단하여 쉽게 접근하기 힘든 음료였다. 반면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길들이면 그 어떤 술보다도 깊은 바닐라 향과 온갖 과실, 향긋한 플로럴 향으로 가득한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 모금을 입에 담고 혀 위에서 굴리는 그 맛을 감히 따라올 것이 없으리라고, 딕은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은 얻기 힘들다고 했나.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영역에 들어가 꼿꼿하게 서 있는 누군가와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도 이 와인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하며 입 안의 액체를 모두 삼켰다. 입 안에 남은 오크향을 느끼며 딕은 일에 열중한 '그'에게 말한다.
"그래서 샤잠과의 식사는 어땠어요? 소득은 있었구요?"
얼음장같이 시린 눈동자가 잠시 마주치더니 금방 되돌아간다. 너무도 짧게 느껴진 탓에 갈증이 난다.
"'마법을 부리는 애송이'가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 그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벌인 쇼였던 거 알고 있어요. 말해 봐요. 앞으로 리그에 도움이 될 녀석인가요?"
"딕, 분명 와인만 마시고 간다고 하지 않았나."
원하던 대답대신 축객령이 내려진다. 맘에 들지 않는 그의 말에 한쪽 볼을 부풀린 딕은 찰랑거리는 액체가 남은 와인 병을 들고 흔들었다. 아직 남았으니 빨리 보내버릴 생각은 말라는 무언의 응답이었다.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브루스에게 보란 듯이 다시 와인 잔에 술을 채웠다. 부드럽고 진한 향기가 공기를 붉게 물들인다.
마치 머리 한 구석을 쥐어박을 것처럼 무서운 얼굴로 딕에게 다가온 브루스는 딕의 손에서 잔을 낚아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잔을 두어번 돌린 다음 입술에 가져다대고 천천히 마신다. 그 입술에도 붉은 향기가 깊게 물들었을 것이다.
"아직 애송이란 호칭도 버거워. 한참은 어리지. 무척이나. "
"음, 그럼 샤잠은..."
"불필요한 의심을 할 가치조차 없다. 그저 순진한 어린애야."
딱 한 모금의 양만 남게 비워진 와인 잔이 다시 딕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만 마시고 블러디헤븐으로 돌아가라는 브루스의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단정하던 드레스 셔츠는 어느새 잔뜩 흐트러진 채로, 브루스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저럴 줄 알았다. 아닌 척 냉담하게 굴지만 이상하게 어린아이들 앞에선 약해지고 부드러워지는 사람이라, 본래 어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샤잠을 그가 냉철하기만 한 눈으로 쳐다볼 수 있을 리 없다. 샤잠이란 인물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앞에서 둥지 안 아기 새를 바라보는 어미 새처럼 굴었을까봐 괜히 심기가 불편해진다. 질투라고 하면 우습겠지만, 그 애정 어린 시선을 받아 본지 한참이나 지났다. 양아들로서, 그의 가장 오래된 파트너로서 불만이 생기지 않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지도. 묘하게 퉁명스럽게 나가는 말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브루스, 그렇게 어린애라고 얕보다간 큰일 나는 수가 있어요."
샤잠에 대한 경고일까, 깊게 연관하지 말라는 충고일까. 의도를 알 수 없는 딕의 말을 들은 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혀를 차는 것을 닮은 소리 같기도 했다. 비웃는 건지 어이 없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돌려댔는지, 소용돌이가 생긴 잔 안의 붉은 액체를 단숨에 삼키려던 딕은 잠시 동작을 멈췄다. 이어진 브루스의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내가 돌봐야 하는 애송이들은 이미 충분해."
모니터를 향한 얼굴은 그대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을 향한 몸 또한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울림이 강한 뱃 케이브에서 그의 목소리를 놓칠 딕이 아니었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브루스의 뒷모습을 쳐다본 딕은 그대로 와인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거 설마 저는 아니겠죠? 애송이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로 너무 숙련됐을 텐데."
그의 어깨에 바짝 다가서서 투덜거리는 딕을, 브루스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기분은 이미 잔뜩 좋아진 상태였다. 가끔씩은 예전처럼 그에게 투정부리는 애송이가 되는 것도 괜찮다. 애송이는 술을 마실 수 없으니,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와인은 나중에 천천히 마셔야겠다. 오랜만에 그에게 받은 애송이 취급은 각별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즐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저택에 모여 있을 브루스의 다른 애송이들을 떠올리며, 딕은 오늘 저택에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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