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가 될지 모르겠지만...완결이 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써 논 부분이 있으니 올려봅니다
6
들어가는 해가 마지막으로 복도를 물들였다. 창문 너머에서 들이치는 주홍빛깔의 햇살은 무척이나 따뜻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둡고 차가운 회색의 복도는 조금의 햇볕으로 따뜻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볕이 비추는 곳은 상대적으로 온기가 감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별반 차이는 없다. 그러나 햇살이 닿는 곳은 밝았다. 하염없이 눈이 부실 정도로.
클락은 그 눈부심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뒤로 성큼 물러서 제 발치에서 아른거리기만 하는 빛의 자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 그러나 클락은 주저앉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서 있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불편했지만 클락에게 그냥 되돌아가는 선택지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저를 위해 다시 학교에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제대로 된 약속이 아니라 그저 통보에 가까웠으니. 그것도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문자로 남겼을 뿐이었다.
[교수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길게 쓰다가 차마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할까봐. 그저 두서없는 짧은 메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와준다면. 클락은 지금 제 속에서 앓고 있는 모든 것들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발, 그가 와 주어야 했다.
구둣발 소리가 들린 것은 복도가 새카맣게 어두워지고 난 다음이었다. 교수실 문 앞에 주저앉은 클락이 양팔로 무릎을 감싼 것에 머리를 묻어버렸을 때이기도 했다. 속도를 올려 성큼성큼 내딛던 소리가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춘 이후에도 클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훑었다. 클락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것의 모양을 알 수 있었다. 마디마디에 담긴 색과 보기 좋게 잡힌 굳은살. 분필을 잡고, 클락의 피부를 잡던 손. 철없는 어린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는 손길과도 비슷했지만 클락은 그것마저 좋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자신을 만지는 것이라면, 그 어떤 동작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락에게는 언제나 브루스가 부족했다. 어떤 접촉이라도 갈구하게 될 만큼.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무심한 듯한 목소리엔 조금의 염려가 담겼다. 클락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 아니길 간절하게 바란다. 고개를 들어 자신이 한참동안 기다리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아 조금을 더 기다려야 했다.
* * *
“내가 정말 안 왔으면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이었어?”
“결국 왔잖아요.”
“대체 무슨 일인데.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바로 가버릴 줄 알아.”
차갑게 말하면서도 클락에게 건네는 머그잔은 따뜻했다. 계절은 이제야 가을로 접어 들어가는 길목. 아직까지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빈 복도에 서 있는 일은 무척 쌀쌀한 느낌이었다. 벽 하나가 놓인 공간이었을 뿐인데도 교수실은 달랐다. 전등이 환하게 비추고, 클락이 앉은 소파가 굉장히 푹신했다. 그리고 저에게 따뜻한 음료를 건넨 브루스가 있다는 것이, 순식간에 클락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맞은편에 브루스가 자리를 잡았다. 그의 옷차림은 평소보다도 무척 간편하게 보였다. 셔츠 한 장과 면바지. 해가 모두 떨어진 지금 시간에는 추울 지도 모르는 차림이었다. 어쩌면 클락이 기다릴까봐 서둘러 왔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애초에 자신에게 연락을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자신의 일방적인 욕심이었지만
그냥 손아귀에 들어온 온기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클락은 잔을 내려놓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제 속을 뭉개던 그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몇 시간이나 자신의 머릿속을 절망으로 이끌던 것을.
“그 여자 누구에요?”
“뭐?”
“오후에 함께 계셨잖아요. 카페에서.”
브루스의 표정이 멍했다. 당황한 건지, 황당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클락을 바라보는 표정이 낯설지만 귀여웠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대신 순식간에 컵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는 브루스에게 짜증이 가득하다. 지나친 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사생활을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클락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브루스에게 물어야 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요?! 알려주면 안돼요?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인가요?”
“내가 너에게 왜 그런 걸 말해야 하는데?”
“나한테는 연인 관계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이미 그런 관계가 있는 것 아니에요? 내가 사귀고 싶다니까 그때는 그렇게 말했잖아요!”
클락의 목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울렸다. 교수실 밖으로, 빈 복도에까지 목소리가 널리 널리 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정적이었다. 이마를 짚고 머리칼을 쓸어 올린 브루스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켄트.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줘야 한다는 거야? 내가 너에게 ‘그런 관계’가 싫다고 말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란 법이 있어? 네 사고방식을 정말 따라갈 수가 없군.”
“하지만, 하지만 브루스!”
“내 일에 대해 신경 꺼. 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 없어. 전에도 내가 말한 것 같은데.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고.”
건조할 정도로 침착하게, 또 한 번 클락의 마음을 거절하는 브루스가 야속하다. 그리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품에 안겨 있을 때의 브루스는 분명 제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불같이 뜨겁게 맞붙었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 뜨거운 감정이 오로지 저에게서만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도 그런 접촉을 해왔던 걸까. 속상함에 쉴 새 없이 입술을 깨무는 클락에게 브루스가 얼음물 한 바가지를 내려붓는다.
“그 선을 지키지 못하겠다면, 이제 그만하자. 너나 나나, 애초에 제대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니까. 더 문제가 생기기 전에 끝내는 게 좋겠어.”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은 클락을 내버려 두고,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기숙사는 가까우니까 걸어가도록 해. 다음엔 수업에서 보도록 하지.”
자신이 들고 있던 컵을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브루스는 문 쪽으로 손짓했다. 한 마디 음성 없는 축객령이다. 눈썹 사이에는 주름이 잡히고 조명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브루스는 클락을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가끔 학생들이 교수실에 모여들어 그를 귀찮게 만들면 이런 식으로 손짓해 내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앞에서 클락은 그저 한 명의 ‘학생’이 되었다.
그럼 앞으로는 브루스의 이런 모습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가면을 쓴 것처럼 완벽한 얼굴을 하고 칠판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클락은 다시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이 되어 먼발치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끔 돌아보는 눈빛이 저와 마주친 것이 아닐까 추측해야만 하는 예전으로 돌아가서.
“무슨 소리에요. 브루스. 저는 아직….”
우린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가슴 속의 무언가가 작은 조각으로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칼날이, 혹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욱신거린다. 이대로 브루스와, 그와의 관계가 없어진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클락은 그와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탐하다가 함께 이불을 덮는 사이. 곁에서 숨 쉬는 것이 행복한 관계. 클락에겐 이미 브루스가 그랬다. 저 또한 브루스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브루스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가. 왜 이렇게 매몰차게 구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원망이, 슬픔이 고개를 든다.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비록 관계의 시작이 그의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해도,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몸을 부대끼던 그 순간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이미 자신에게는 그것이 모두였는데. 저를 구성하는 가장 커다란 조각이 되어버렸는데.
“당신은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요? 저와 만나면서, 입을 맞추고 몸을 끌어안으면서 정말…. 내게 바란 것이 오로지 몸뿐이었냐고요!?”
“몸으로 시작해서 좋아져 버렸다,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이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어.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거라면 사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겠지. 그런 장난은 피곤해. 질색이야.”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른 브루스가 몸을 틀어 클락을 지나쳐갔다. 어깨가 살짝 부딪혔을 뿐인데, 클락은 제대로 설 수 없어 주저앉을 뻔 했다. 그 대신 겨우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간다. 브루스는 옷자락에 단단하게 엉겨 붙은 손가락을 째려보고, 클락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보자 클락의 숨통이 다시 터졌다. 그리고 또 다시 깨닫는다. 자신은 이대로 그를 보낼 수가 없었다.
“못 끝내요. 당신이랑, 나. 이렇게, 이런 식으로는 절대 못 끝낸다고요!”
“끝내기 싫다고 해서, 그렇게 우긴다고 네가 뭘…!”
클락이 그를 강제로 끌어당겼다.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벽으로 밀쳐, 강제로 입술을 들이민다. 브루스는 몸을 틀어 클락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강하고 단호해서, 브루스는 클락의 입술을 막아낼 수 없었다. 단지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이 유일한 저항에 가까웠다.
클락은 브루스의 입술을 깨물고 문질렀다. 브루스가 자신을 밀쳐내려 애를 쓴다는 것을 알면서도 클락은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브루스에게 깨물린 혀에서 피 맛이 느껴졌을 때에 그를 놓았다. 어쩔 수 없어서 놓쳤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비린 맛이 혀에 감돌아 클락은 침을 삼켰다. 날카로운 치아에 긁힌 혀 부분이 아팠다. 브루스와 닿아있던 혀와 입술이 후끈거렸다. 다시 한 번 그를 끌어당기려는데 그가 클락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정말 제멋대로 구는군.”
“당신이 날 제대로 봐주지 않잖아요! 난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당신을 가지고 싶어서 정말,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먹을 쥔 브루스의 손이 떨렸다. 날카로운 눈빛에서, 그가 몹시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클락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격양된 브루스의 목소리가 아팠다.
“그 다음엔 뭐야? 이제 강간만 하면 되겠군.”
“아니에요!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요, 절대로!”
“그럼 협박이야? 소문이 나기 싫으면 여기서도 다리를 벌리라고?”
“브루스!”
강제로 그를 붙들고 입을 맞춰서는 안 되었다. 특히 자신과 브루스와 같은 관계에서는. 협박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어, 부적절하게 시작된 관계였다. 그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고 싶었다면 클락은 그들의 첫 단추를 다시 끼웠어야 했다. 잘못 낀 단추를 몇 번이나 끄집어내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클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브루스와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까지의 만남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만 서면,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가 않는다. 어쩌면 브루스에게, 자신은 엄청나게 한심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브루스. 정말 이게 아닌데….”
“…여기까지 해. 더 이상은 내가 참아 줄 수가 없으니까.”
“아, 안돼요, 브루스!”
클락은 다시 한 번 브루스를 잡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힘을 주어 결박한 것이 아니었다. 세게 잡으면 그가 뿌리칠 까봐. 깨물린 자신의 혀끝처럼, 버려진 마음 한 쪽처럼 아플까봐. 오로지 그의 셔츠만을 손에 쥐었다. 스스로의 눈에도 미약하게 잡은 손은, 사시나무 떨 듯 했다. 정말 다행이도, 브루스는 클락의 손을 뿌리치거나 옷을 떨어내지 않았다. 연약하게 잡은 클락의 손을 내버려두고, 클락에게로 고개를 돌려 줄 뿐이었다.
“내가 잘못 했어요. 당신이 싫은 것을 강요하지 않을게요. 스킨십이든 연인 관계든, 모두….”
클락의 목이 잠겼다. 갑자기 목이 막히고 갑자기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버려지고 혼자 남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친 파도 위에 던져진 부표처럼 온 몸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자신을 더 바보같이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손을 내릴 수가 없다. 그를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브루스와 닿아있는 그 일부가, 자신의 모든 것 같이 느껴져서.
“바보처럼 굴지 않을게요. 제멋대로 착각하지 않고, 주제넘게 나서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할게요. 그러니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눈 쪽에 후끈후끈 열이 몰렸다. 열기는 미지근한 물줄기가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렇게 못난 자신이 미웠지만 그를 놓쳐버리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물로 가득 차버린 목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세요.”
몸 밖으로 나오는 눈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지만 물줄기는 그쳐버릴 줄은 몰랐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갈 때까지 울 수도 있을 듯 했다. 일렁일렁한 눈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물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행운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마주하는 것이 아쉽기도, 그리고 무섭기도 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뺨 위로, 손바닥이 느껴지고, 곧이어 기다란 손가락이 눈물을 닦아준다. 그 손길이 무척 어설프지만 또 다정했다. 감촉을 느끼며 주룩 주룩 흘려보낸 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두 개의 방울을 마지막으로 떨어뜨리고 멈춘다. 그 사이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브루스는 그 뺨을 여전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조금 당황했고 조금 미안해하는 매끄러운 얼굴을 보자, 다시 코끝이 울린다.
“클락. 나는….”
낮은 목소리가 멈추고, 짤막한 한숨이 공간을 채운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클락은 뒷말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침착하고 다정하게.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실수로 땅바닥에 놓쳐버려 울고 있는 아이를 위로할 때 들을 수 있을 듯한 목소리였다.
“제발, 브루스. 제발요….”
브루스는 대답이 없었다. 클락의 뺨 위로 한 번 더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그의 입에서 클락이 애타게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듣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자신을 밀어내는 아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클락이 브루스를 놓았다. 그리곤 흔들리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어두운 복도에는 그와 함께 있던 교수실에서 새어나온 빛뿐이었다. 브루스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클락은 멈추지 않고 복도 저편으로 뛰었다.
* * *
클락이 기숙사에 도착해 침대에 몸을 누인 것은 새벽녘이었다. 학교에서 기숙사까지. 그다지 멀지도 않고 하루에 몇 번이나 오가던 길을 몇 시간이나 헤맸다. 익숙할 수밖에 없는 길이 낯설었고,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클락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친구들과 큰 소리로 떠들며 걸었던 길과 집만큼 익숙해진 건물마저 클락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밤하늘을 해치고 밝은 빛이 줄기를 드러냈을 때야 자신이 들어갈 곳을 알 수 있었다. 양동이 하나 정도는 될 만큼 수분을 뽑아낸 덕에 클락은 거의 탈진 상태였고, 이불에 피부가 닿자마자 의식을 잃듯이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아파, 클락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미가 자신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기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몸을 아무리 흔들어대도, 일어나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기조차 못한다. 침대가 빙글빙글 돌고, 클락 위의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머리가 빙글빙글 돌다니. 언젠가 친구가 준 질 낮은 술을 마시고 난 이후에 시달렸던 두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통증이 잦아지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몇 시쯤 되었는지, 수업에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맙소사. 클락, 너 몸이 불덩이잖아!”
클락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지미가 이마를 짚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뗀다. 그제야 클락은 왜 이렇게 지구가 어지럽게 도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워낙에 건강한 체질이라 어릴 적부터 감기에 걸려본 적이 손에 꼽지만 분명 이런 감각이었던 것 같다. 난리를 치는 지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거대한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성실함은 클락의 성격이었다. 전공 교수님의 수업이어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클락은 쉬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결국 눈을 감아버리는 클락을 보고 지미가 난리법석을 떤다.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 말 했으면 약을 구해왔을 거라고 외치던 지미가 어딘가에 사놓은 약이 있을 거라며 서랍을 뒤지느라 온갖 잡동사니를 쏟아놓는다. 클락은 그런 지미를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지미의 손목시계를 살피자 수업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은 아파서 결석을 한다고 해도, 지미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소리가 무척이나 거칠었다.
“난 괜찮으니까, 빨리 가.”
분명 자신의 목소리가 끔찍하게 들린 것 같은데. 귀까지 먹먹해서 소리가 이상한 것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난장판이 된 서랍과 누워있는 클락을 번갈아 쳐다본 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약을 다 먹었나봐. 수업 끝나자마자 사 올게.”
지미가 클락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픈 동생을 돌보는 것처럼 자상한 염려가 담긴 동작이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웃으려고 벌린 입에선 기침만 튀어나온다. 지미는 클락의 머리맡에 핸드폰을 찾아 켜둔다. 만약에 몸이 더 힘들어진다면 바로 구급차를 부르거나 자신에게 문자를 남기란다. 시간에 쫓긴 지미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고, 클락은 천천히 핸드폰을 쥐었다.
문득 핸드폰이 궁금해서 버튼을 누른다. 빈 핸드폰 화면에는 현재 시간을 알려주는 글씨만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이유 없이 가슴께가 먹먹해진다. 손끝으로 화면을 문지르던 클락은 메시지 어플을 켰다. 그렇게 무수한 메시지를 받으면서 꿈쩍도 하지 않은, 야속한 사람이 보낸 단 하나의 답장이 보였다. 몇 번이나 반복해 보게 만든 그 짧은 내용이 지금은 너무 많이 아팠다. 미운 말을 쏟아내던 입술과, 자신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클락을 따라붙었다.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도 미련이 끊이지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바짝 마른 목구멍이 아파오는데, 맘 한 쪽 치졸한 것이 그것을 기회로 삼으라 말한다. 어쩌면 그의 동정심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불쌍해서, 한 번쯤 다시 만나줄지도 모르는 법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이 느리게 메시지를 만들었다.
[브루스, 저 너무 아파요.]
한참을 걸려 만든 메시지 위에서 떠도는 손가락은 차마 전송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고 못나서, 클락은 자신의 질척거리는 태도가 오히려 그를 질리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사실 클락이 필요한 것은 브루스의 사랑이었지, 그의 동정과 경멸은 아니었다. 더 이상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구별할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부자락만 스쳐도 아픈 눈가에 또 다시 열이 몰렸다. 후끈한 기운과 함께 폭풍처럼 밀려오는 두통에 클락은 휴대폰을 팽개치고 잠자코 베개에 머리를 박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 * *
클락은 지미가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르고 잤다. 그가 클락의 몸을 일으키고 물과 약을 넘겨주었던 것은 기억난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것들을 겨우 삼키고 클락은 다시 누웠다. 지미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지치고 피곤해서 대답을 하기 힘들었다. 지미 이외에도 저와 어느 정도 교류를 하던 친구 몇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이렇게 아프면 응급실을 가야한다,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 낫겠다, 하며 그들끼리 시끌시끌 떠드는 와중에도 클락은 그저 눈을 감고 몽롱하고 어두운 바다 속을 헤맸다. 저를 흔들며 대답을 요구하는 말에는 대충 고개를 가로 젓고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몇 번 반복했다. 뜨거운 김이 쏟아지는 스프가 제 앞에 들이밀어졌을 때도, 클락은 잠을 자고 싶다고 말하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 같이 굴었다. 약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클락은 어렴풋이 짐작했으나 어쩌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는 브루스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고, 길을 걸었다.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기도 했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의 순간 브루스는 클락을 바라보았다. 눈가를 부드럽게 접고 눈썹을 움직이는 장면은 분명 클락을 놀릴 때의 모습이리라. 무언가가 즐겁다는 듯 웃는 얼굴은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 무한히 그 순간 안에 담겨있고 싶었다. 브루스가 자신과 함께 있는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필을 쥐고 칠판 앞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책상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곤 했다. 때때로 누군가와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를 관찰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해서, 편안해서. 언제까지나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꿈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것 이었지만. 약을 먹으라는 지미의 채근에 꿈에서 깨고 나면, 클락은 단숨에 약을 삼키고 도로 누웠다. 또 다시 브루스를 만나고 싶어서, 간절히 브루스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틀을 그렇게 약에 취해 꼬박 앓았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갑작스럽게 앓게 된 병도 클락을 오랫동안 괴롭히지 못했다. 지미가 건네준 네 번째 알약을 목 너머로 넘기는 순간, 클락은 감기가 모두 나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한 몸처럼 붙어있던 이부자리가 지겹지도 않은지, 몸은 쉽게 일으켜지지 않았다.
사실 이유가 있긴 했다. 자신의 맘을 아프게 하고 몸까지 병이 깃들게 만든 사람. 그의 수업이 어느새 자신의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꿈에서는 그야말로 달콤한 솜사탕처럼 저를 녹여버리던 그를 만날 수 있는 수업에 차마 발걸음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안달 나게 만들며 따듯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도, 차갑게 저를 거절해버렸던 브루스를 어떻게 봐야할지 클락은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이 며칠 동안 엉망진창이 된 것과 달리, 너무 멀쩡한 얼굴로 평범하게 서 있을 그가 두려웠다. 차라리 조금만 더 아팠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하루만 더 아팠으면 그의 수업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쩌면 결석한 자신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지 브루스가 먼저 연락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러 핑계를 대면서 클락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열이 내려가, 더 이상 감기지 않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도 온 몸을 이불로 감싸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제 곁에서 꾸준하게 저를 돕는 친구 눈에 그 모습이 굉장히 이상하게 보인 것은 당연했다. 눈치를 보면 지미가 아직도 많이 아프냐고 묻는다. 어물거리며 변명한 클락은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멀쩡하게 들린 것을 민망해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눈만 끔뻑거리던 지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추궁한다.
“네가 이렇게 앓는 거 처음 봤다. 단순한 감기 몸살이 아니었던 거 다 알아. 솔직히 말해. 너 차였어?”
조금의 신호도 없이 제 명치까지 쳐들어온 직구에 클락은 아무 말도 못했다. 사실 아니라고 부정 할 수도 없었지만. 너무 당황스러워 감추지도 못하는 표정을 본 지미는 몇 분 동안이나 클락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이불 속에 있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힘내. 다 그런 거지, 뭐. 세상에 좋은 여자는 많아.”
진실까지 딱 한 발짝을 남겨두고, 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지미의 위로를 받으며 클락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이 옳은 걸까. 다들 이런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열병에 걸린 것마냥 아프고, 혹은 정말 열병에 걸려버리고. 그리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옮겨 예전의 감정은 까마득하게 잊어 치유될 것이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자신의 고통도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몸이 나은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클락이 고개를 끄덕일수록 그것이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수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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