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임에도 살갗을 태울 것 같을 정도로 환한 조명이 가득했다. 수천 개의 조각마다 각기 다른 빛을 뿜는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흔들렸고 번쩍거린다. 클락 켄트는 그 화려한 조명에서 조금 빗겨간 곳에 서 있었는데도, 제 뺨이 구릿빛으로 타기 전에 눈이 멀어버리는 게 먼저겠다고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그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낚싯대처럼 드리우고 기삿거리를 건져내기 위해 빽빽하게 서서 몸을 부대끼고 있는 커다란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섞여 들어가 있으면서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서 있는 클락은 조금도 초조해한다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손가락에 끼운 볼펜을 일정한 속도로 흔들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수첩에 부딪히게 했다. 누군가의 구두소리와도 닮아 있는 그것이 멈춤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진다.
“브루스 웨인, 여기 한 번 봐주세요!”
“고담 가제트 입니다, 웨인씨!”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저에게만 들이밀어진 렌즈와 마이크를 쳐다보며, 브루스 웨인은 제 이름이 불렸다는 것에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더니 한 박자를 쉬고 난 후에 살풋 웃는다. 이어서 이렇게 많은 카메라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순진한 멘트를 던지면, 사람들은 전염이라도 된 것 마냥 모두 함박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가증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연기에도, 그의 눈짓과 손짓 하나에 사람들은 자지러지며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온갖 매스컴을 점령할 것이다. 미디어에 몸을 담은 사람치고, 그를 탐내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신참내기 기자로서 클락도 그 내용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브루스 웨인의 인생부터가 한 편의 극과도 같았다. 미국에 살면서 웨인 기업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고담의 웨인 부부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 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혔다. 십여 년 전의 어린 클락 또한 TV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뉴스를 봐야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어야 했던 아이는, 저에게 쏟아지는 여러 종류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져 슬픔을 삭이기 위해 십여 년간 고담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비극을 견디고 돌아온 아이는 그야 말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완벽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미대륙 전체에서 손꼽히는 기업의 외동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평균을 넘어서는 커다란 키에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수려하게 성장했다. 게다가 부모님에게 좋은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덕에 그 누구보다 훌륭한 알파로 발현했다. 그의 달콤한 체취는 충분히 무르익어 마치 만개한 꽃과 같다고 말한다. 상대의 맘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것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인구의 5%도 채 되지 않는다는 우성 알파로 발현한 것이다.
고담에 웨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벌떼처럼 취재를 나갔던 사람들의 기사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의 체취를 칭찬했다. 신문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웨인 부부의 성질과 그들의 향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들어지고, 내로라하는 체취를 가진 유명한 알파들의 향이 분석되며, 브루스 웨인의 향이 갖는 우수성과 특이성을 찬양하는 기사들이 몇 개나 나왔다.
알파들은 브루스 웨인의 체취를 선망했으며, 베타들은 옅게나마 맡아지는 그의 향에 빠져들고 싶어 했고, 오메가들은 그 향에 점령되기를 바랐다. 때문에 브루스 웨인이 참가한다는 소문이 있는 행사에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혹은 그의 향을 한번이라도 맡아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의 상황 또한 그랬다.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이 브루스 웨인을 쫓았다. 알파답지 않게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모두의 인터뷰에 충분히 응해주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클락은 사실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분위기에 취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브루스 웨인은 기자들이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불쾌한 표정으로, 혹은 성난 목소리로 그들을 거절하거나 물리지 않지만 충분히 제 마음대로 굴며 사람들을 주무르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잘 들어맞는 우연이라고 말하겠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에 던지는 웃음의 개수까지 정해져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한 손에 쥐어 잡고 휘두르는 걸 좋아하는 남자니까. 고담의 황태자나 카사노바와 같이 유명한 별명이 아닌, 그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얼굴을 칭하는 단어를 클락은 알고 있었다. 통제광. 옆 사람도 듣지 못할 작은 울림을, 클락은 혼자 혀끝으로 씹었다.
“계속해서 맡고 싶은 향이에요. 공기 중에 남아 있는 것들을 빨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멀어진 역삼각형의 등을 홀린 듯 바라보며, 클락은 낯이 익은 기자 한 명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는다. 그녀는 성향은 베타였는데, 베타는 알파와 오메가의 향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통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야말로 넋이 빠진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을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받는다.
“정말이야. 맙소사, 같은 알파임에도 무릎을 꿇고 싶어질 지경이군.”
클락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감추어, 베타의 흉내를 내고 있는 클락은 볼펜으로 작대기 몇 개를 그어 내리며 “정말 황홀하네요.” 라고 거짓말을 꾸며낸다.
<구간 리뉴얼> 운명을 사랑하라 - 6,000원
*책 사양*
A5 / p78 / 떡제본/ 19세 미만 구독 불가
주의 : 히어로가 없는 시대물 AU입니다. 고증 없고 어설픈 시대물입니다(mm 황태자 클락, 친구이자 신하인 브루스가 등장합니다 묘사는 영화버전입니다
지난 쩜오온리전에서 판매되었던 글에 외전 두개가 덧붙여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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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트위터(@adelloonb)를 통해 공지하겠습니다
*샘 플*
Ⅰ
맨손으로 짚은 동굴의 벽이 차가웠다. 짐승의 분비물이나 뼈가 없는 것으로 보아선 버려진 동굴인데, 생각보다 무척 쾌적한 편이었다. 성인 남성이라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들어와야 할 정도로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다. 동굴 위의 바위틈으로 옅게나마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동굴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 덕분이기도 했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도 좋다.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필요한 도주로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여기라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이정도면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하지 않은 지역, 그것도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찾아낼 수 있는 피난처로는 이만한 곳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더 악화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만.
동굴 구석구석을 확인한 브루스는 제 몸을 꽁꽁 감싼 망토를 풀어 헤쳐 바닥에 펼치고, 동굴 입구 쪽에 기대어 놓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망토에 파묻힌 남자는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브루스의 속삭임에도 그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다. 브루스는 그 사람을 부축하여 이불처럼 펼쳐놓은 망토 위에 눕히고, 머리며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덮어두었던 천을 잡아끌었다. 탄력 있게 곱실거리는 까만 머리카락 아래의 뺨은, 손을 가져다대지 않아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붉었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브루스의 심장이 불안으로 쿵쿵 뛰었다. 절친한 친우이고, 소중한 존재인 것을 떠나서, 이 남자의 앞에서는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브루스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며 비실거리고 있는 남자는 크립톤의 황제가 될 사람이었으니까.
대륙의 어느 도시, 심지어 스몰빌같은 시골에서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의 이름인 ‘칼 엘’은 몰라도, 모든 코흘리개 개구쟁이까지 ‘크립톤의 마지막 아들’이라는 별명은 알았다. 황제 조 엘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이유였지만 그것보다 그의 인생에 걸쳐진 드라마틱한 사건의 역할이 더 컸다. 그는 무려 이십여 년 동안 ‘사라진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