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뱃] blind date
구님 생일 연성입니다
구님 생일 축하해요 내 존잘님ㅠㅠㅠㅠㅠㅠㅠ
“그러니까, 정말 필요 없다니까. 괜찮은 척 하는 게 아니라-.”
- 상대방한테 말했으니까 무를 수 없다고 하잖아. 그냥 한 번 만나 보라고! 키 크고, 몸매 좋고, 네가 좋아하는 연상! 네 취향에 맞추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그러니까 누가 그런 부탁을 했냐고. 배리가 중얼거렸지만, 휴대폰 건너편의 사람은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관심도 없다. 잘생긴 외모에, 호탕한 성격, 의리있는 친구인 할은 가끔 이런다. 쇠뿔도 단번에 빼는 대범하고 화끈한 것은 존경할만하지만 막무가내와 한끝차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배리가 아이리스와 헤어진 이후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성화를 하던 걸 괜찮다고 둘러대며 사람을 소개해준다는 것을 몇 번이나 거절을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약속을 만들어 버린다. 굳센 의지로 말하자면 감히 그린랜턴을 이길 사람이 없는지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취소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나가서 식사라도 하고 오라는 할의 말에 배리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거기에 대고 시간과 약속장소를 다시 한 번 읊어주며 ‘검은 옷에 붉은색 액세서리를 했어.’라고 외치고는 통화를 종료해버린다. 절친한 친구의 원치 않은 호의덕분에, 어쩔 수 없이 배리는 약속장소로 갈 수 있는 빠른 길을 검색해야만 했다.
사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직도 아이리스만을 사랑해서 그리워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기에 너무 빠른 시기도 아니었다. 적당한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찾아,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 괜찮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직장과 집만 열심히 오갔다. 할이 보기엔 배리의 그런 삶이 너무 외롭고 삭막하게 보인듯 하지만, 배리의 입장에선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다.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바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직업을 바꾼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하던 일만 하면서 왜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냐고 묻는다면 배리의 또 다른 삶과 관련이 있다. 제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라 해도,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자잘한 사고부터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빌런들을 막는 일은 끝이 없다. 사람들을 지키는 일은 도저히 익숙해지려야 쉽게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새로 사귄 친구는 엄격하기 그지없어서, 그와 같이 팀업을 해야 할 때면 처음 수트를 입고 도시에 들어선 순간마냥 떨렸다. 대외적으로는 한없이 유쾌하고 사근사근하지만 가면 하나만 뒤집어쓰면 아무도 뚫지 못할 두꺼운 벽을 세우는 사람이라서, 좀처럼 접근하기 힘들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다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야할 사람이라 더 친근한 관계가 되고 싶기도 했다. 문제는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걸 보면 다정한 성격이 분명한데, 가까워지려나 싶다가도 거리를 둔다. 맘을 열지 않고 그저 멀찍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아쉽기도, 섭섭하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가까이하기에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에 비해 배리는 너무 어렸고, 자경단 활동을 한 기간도 훨씬 짧았으며 가면 안쪽으로는 그저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가면이 없을 때도 한없이 빛나는 ‘브루스 웨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려다가도 조금씩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훌륭한 영웅인 그와 진심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도시전설로 여겼던 그의 존재를 확인한 것 자체가 신기하고, 곁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요즘의 배리는 그와 친해지는 것을 목표로 잡아서, 틈만 나면 그에게 연락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배리가 묻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증거로 몇 시간 전에 그에게 보낸 메시지엔 지금까지 짧은 답장 하나 없었다. 날짜와 시간만 덩그러니 떠 있는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다가, 배리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지 않는 시간만 훌쩍 다가와 있었다.
약속 장소는 호텔이었다. 늦지 않도록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딴 생각을 하며 오다보니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 첫 만남 장소가 호텔이라니, 평소에 잘 오지 않던 장소라 새삼스럽게 긴장이 된다. 호텔 유리에 모습을 비추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부의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무척 한가로웠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테이블에 무심하게 앉으려던 배리는 그 조용한 곳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어? 브루스?”
그 소리에 검은색 양복을 입고 신문을 읽던 그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리와 똑같이 놀란다. “배리 앨런.” 여기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 것이 기쁘고 또 신기해서, 순식간에 기분이 들떠버린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센트럴 시에 온다는 소식은 몰랐는데...”
“갑자기 정해진 약속이라 말할 틈도 없었어.”
배리는 브루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이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카페 안을 한 번 훑었다. 상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브루스와의 대화를 더 이끌어 갈 수 있겠다는 사실에 앉아도 되는지 그의 눈치를 본다. 브루스가 손짓을 하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았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브루스 앞에는 이미 잔이 하나 놓여있었고, 배리는 조금 이따 주문하겠다고 거절했다.
“이런 데서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전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는데 아직 안 와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조금 늦나보군.”
배리는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아하게 정리된 머리칼과 깔끔한 턱과 뺨을 보면 도저히 배트맨과 동일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배트맨은 일이 바쁘면 수염이 따갑게 올라오고 얼굴에 생채기가 생겨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처럼 말끔한 회장으로서의 모습을 마주하면, 오랫동안 자경단 활동을 한 그의 정체가 비밀로 유지될 수 있는지 납득이 되고야 만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검은 양복과 짙은 붉은 색의 넥타이가 완벽하게 어울린다. 역시 검은 옷에 포인트를 주기엔 붉은 색이 좋다고 생각하다가, 뒤늦게 생각하나가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키 크고, 몸매 좋고, 연상. 검은 옷에 붉은 액세사리까지. 설마, 혹시...
“제가 오늘 만날 사람이 브루스에요?”
하고 배리는 너무 놀라 다시 큰 소리를 내버린다. 뒤에 이어 맙소사, 하는 감탄사를 내뱉는데 그것은 충격의 표현이라기엔 너무 즐거운 목소리였다. 브루스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긴장이 풀려버린 배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전 할이 무작정 나가라고 해서... 제가 다른 사람 만날 시기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근데도 나가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호텔에 왔는데 당신이 있을 줄이야!”
“앨런, 난-.”
“배리라고 불러요. 요즘 들어 저한테 우울해 보인다, 불쌍해 보인다 하더니,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그랬나봐요. 사실 할한테 하소연을 좀 했어요. 당신은 나한테 관심도 없고,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아쉽다고.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엄청 그랬거든요.”
배리는 당황한 브루스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너무 많은 말을 빠르게 쏟아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쩌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한 거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친해지고 싶어서... 어, 그렇잖아요. 자꾸 만나서 얼굴을 보다보면 친해지니까. 친해지면 팀업에도 도움이 될 테고... ”
빠른 속도로 피가 쏠려 귀와 볼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민망해진 배리가 제 손으로 열심히 귓불을 문지르는데, 브루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본다. 그 표정은 분명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슬쩍 미소를 짓는 입매엔 장난이 가득했다.
“그래서 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는 말인가?”
“데, 데이트라고 하면...”
이상하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배리가 제 입에서 튀어나올 다음 말을 예측하기도 전에, 그들의 테이블 곁으로 성큼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웨인씨. 갑자기 수습할 일이 생겨서...”
“괜찮습니다. 덕분에 재밌는 시간을 보냈으니까.”
갑작스런 사람의 출연에 어안이 벙벙해진 배리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 곁의 사람을 쳐다봤다. 싱 반장님을 만나러 과학 수사반을 방문한적 있던 사람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에서 종종 봤던, 센트럴 시티의 시장님.
브루스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배리는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곤 얼굴이 하얘졌다가 그 전보다도 훨씬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밀려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당장이라도 그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배리 입장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충동을 참느라 힘겨웠다. 그 맘을 알기라도 하는 지, 브루스는 배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데이트는 나중에 하자고, 청년.”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그것이 호텔 문 밖으로 사라지고, 까만 원피스에 붉은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진짜 데이트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배리는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