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뱃전력] 감기,간호
2016.09.10 내용이 맘대로 안 풀려서 비공했던 글입니다
블로그 정리하는 김에 올려봐요
슈퍼맨이 어린 느낌입니다
“입 벌리고, 소리내봐.”
“네? 뭐라고요?”
“그냥 아- 하고 소리 내라고.”
퉁명스럽기는. 그래도 클락은 불평을 삼키며 순순히 성대를 움직여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차가운 쇠막대가 혀를 아래로 내리누르고 작은 불빛이 입 안을 헤집는다. 클락은 어린 시절,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보건소의 건강검진 이후에는 진찰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불편하거나 어색한 것은 모두 그것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제 앞의 검정 박쥐가 의사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한몫 하고 있겠지만.
제 몸에 찾아온 이상이 아니었다면 배트맨을 찾아와 어린애처럼 몸이 아프다느니 이상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가 느낀 것은 상당히 생소한 감각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디가 아픈 것도 크게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란 태양 아래서 30년간 살아왔던 크립토니안에게는 무척 이상한 경험이 분명했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이마와 뺨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팔, 다리는 미묘하게 무겁고 머릿속이 산만했다. 어째서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외계의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것일까. 복귀하자마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임무를 마치고 온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외부 은하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고 충분히 의심할 만한 것이다. 혹시나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지구에 돌아가기 전에 검사할 필요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쓸모없는 외계인이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눈총을 주는 어떤 박쥐에게 꼬투리를 잡힐 줄 모르는 일이니. 결국 문 앞에서 몇 분 동안이나 서성이던 클락은 결국 그 박쥐 앞에서 입을 열어야 했던 것이다.
“몸이 이상해요, 브루스.”
라는 말로.
제 몸이 이상하다는 클락의 말을 듣자마자 배트맨은 크립토니안의 피부를 뚫을 수 있는 특수한 주사기를 통해 피를 뽑아냈다. 혈액을 기계로 검사하는 것과 동시에, 작은 의자에 주저앉힌 클락의 안색과 피부, 안구상태, 입 안까지 모두 살핀다. 거침없이 능숙한 손길에 그가 의학적 지식 또한 풍부하다는 것을 알아버린다.
체온을 재주는 온도계가 귓구멍으로 들어갈 때는 클락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반응이 어이없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배트맨 때문에 민망해진 나머지 간지러워서 그랬다는 것처럼 귀를 긁는다.
배트맨은 암호를 끼적거리는 것처럼 차트를 채우고, 기계에 의해 혈액검사도 나온 결과를 살핀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인지, 배트맨의 얼굴이 탐탁지 않아 보인다. 다시 기계에 혈액을 집어넣고, 매서운 눈으로 카트를 들여다보더니 멀거니 앉아 결과만을 기다리는 클락의 앞에 위압적이게 몸을 세운다. 그리곤 마치 제가 정말 의사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증상은?”
클락의 증상을 원하는 것이다. 분명 아까 몸이 이상하다고 할 때 자세히 말해줬는데 그건 저 뾰족한 귀의 저편으로 흘러버린 것이 분명했다. 클락은 절로 볼이 불퉁해지는 것을 느꼈다.
“증상은 아까 말했잖아요. 몸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아까는 안 들었으니까 다시 말해.”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클락은 불만이 역력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배트맨의 카울에는 표정 변화가 없다. 결국 반항답지도 않은 반항을 그만두고 그에게 말했던 증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뻐근해요. 목은 간지럽고 뺨이랑 몸에 살짝 열기가 있는 거 같고…. 아, 팔이랑 다리도 살짝 무거워요.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왜 그런 걸까요?”
그의 말에 배트맨은 흠, 하고 의미심장한 숨을 내쉰다. 그리곤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올리곤 맨 손을 클락에게 뻗었다. 긴 손가락이 얼굴로 다가와 제법 섬세하게 그의 이마를 짚었다. 묘하게 시원한 그 손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로 후끈거리는 열기가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제 이마를 모두 가리는 손바닥이 그답지 않게 다정하게 느껴져 클락은 눈만 꾹 감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확실히, 어딘가 아프긴 한가보다.
“분명 미열이 있긴 한데.”
“내가 아까도 그랬잖아요. 몸에서 열이 있고 목구멍이 간지럽고….”
“미안한데, 애송이. 혈액검사나 차트에 적힌 것을 보면 넌 확실히 정상범위야.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감염된 바이러스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 그렇지만…!”
배트맨의 말에 클락은 그저 입을 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머리가 울렁거리고, 열이 나고, 몸이 무거운데도 정상이라니!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즐거워할 일이건만, 몸이 평소와 같지 않은데도 검사 결과가 똑같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앞에서 꾀병이라도 부린 것 같은 느낌에 클락은 민망하고 또 당황스러웠다. 이젠 오히려 그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평소에도 저를 애송이라 부르며 어린아이 취급하는 그에게, 아프다고 칭얼거렸으니 얼마나 철없이 보였을까. 지금처럼 제 건강한 몸이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 탓에 클락의 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빨갛게 익어가는 클락의 얼굴을 본 그는 잠자코 차트로 시선을 올린다. 턱에 손가락을 기대고 몇 분을 응시하더니, 한숨을 크게 내쉰다.
“아직까지 특이한 사항은 없지만 만약을 위해 좀 더 검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몇 가지 더 실험해 볼 테니 기다려. 전염병이 있는 병이라면 큰일이니까, 함부로 지구로 내려갈 생각하지 마.”
“…멀쩡하다면서요.”
“잠복기일 수도 있지. 귀찮게 굴지 말고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와. 나도 다른 검사를 준비할 테니까.”
클락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배트맨은 망토를 떨어뜨리고 카울을 벗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드러나자, 클락은 건강검진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아닌 제 앞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내리 깔아졌던 눈꺼풀이 진한 자국을 만들며 올라가자 조금은 차갑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나온다.
또 다시 팔다리가 저릿저릿하며 심장이 무거워진다. 몸의 가장 끝부분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니면 목구멍을 간질이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이상한….
“뭐해. 준비 안 하고.”
“할거에요. 옷 갈아입으려고 했어요.”
갑자기 몸 안에서 생동하는 이상한 증상을 여실하게 느낀 클락은 수트를 벗어 바구니에 대충 밀어 넣었다. 그리곤 뒤를 돌아 옷을 벗었다. 전에는 몇 번이고 서로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옷을 벗어던져 알몸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제 몸에 닿아있을 그의 시선이 새삼스럽다. 괜히 밍기적거리며 몸을 가리며 옷을 입는다. 브루스가 그 모습을 봤는지 뒤편에서 헛웃음 같은 것이 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예기치 않은 전투로 인해 부상을 당했을 때나 입었던 옷을 걸치니 아까보다도 몸이 더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이상이 없는 거면 어쩌지. 꼼짝없이 꾀병 취급을 받으면 부끄러워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거기 꾀병부리는 애송이, 준비 되었으면 여기 누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의 말에 따라 몸을 눕히면서도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기다린 손가락이 다시 이마를 짚고 목덜미로 내려와 맥박을 잰다. 브루스의 손이 닿는 구석마다 열이 오르고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서,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맥박이 빠르기도 한데.”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브루스에게 그것 보라며 꾀병이 아니었다고 거들먹거릴까 하다가 목소리를 감추고 조용히 누워있기를 택했다. 손 마디마디가 굵고 거칠지만 서늘해서 기분 좋은 손의 감촉을 느끼며 클락은 조용히 제 몸의 이상을 되짚어나갔다. 증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더라?
제일 먼저는 목 부근이 간지러워지며, 열이 났더랬다. 그 순간은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임무가 무사히 끝났다는 보고를 남기고, 배트맨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지구로 돌아가던 순간이었다. 워프포탈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배트맨을 향한 플래시의 시답잖은 장난이 있었고 언제나 무표정으로 그것을 넘기던 배트맨이 오늘은, 어이없다는 식으로 작게 웃었다. 결코 크지않아, 미세하게 입꼬리만 말려 올라가는 그런. 웃음답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카울 건너편의 그가 지었을 표정이 상상되어 조금 놀랐고, 그리고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무기력한 것이 팔다리를 사로잡은 것 마냥 움켜쥔 것이.
확실히 제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아직 제 몸의 바이러스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고, 어쩌면 자신은 지구의 과학 기술로는 발견하기 힘든 무언가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일지도 모른다. 부디 그가 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 질병의 이름을 찾아주길. 클락은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작게 동동거리는 제 심장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