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뱃] AU로드 슈퍼맨
보고 싶은 장면이 있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정작 그 장면은 눈꼽만큼도 안 나왔네요;
나중에 뒤를 이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처럼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벽과 바닥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색채와 손을 가져다대지 않아도 느껴 지는듯한 차가움은 건물 안에 들어온 사람을 손쉽게 압도한다. 조금이라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장소다. 그럼에도 이 장소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다시 한 번 피며 브루스는 양복 상의의 단추를 꼼꼼하게 채웠다. 오늘은 반드시 만나야했다. 비록 그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잃을 것이 생긴 다해도.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이 조용한 적막 가운데 두껍고 탄력 있는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브루스는 서늘한 한기가 제 목덜미에 닿는 감각을 느낀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공중에 떠 있던 사내는 아주 사뿐하게 바닥을 딛고 선다. 뛰어난 예술가가 공을 들여 만든 것처럼 조각 같은 얼굴에는 무엇보다도 깊은 색의 파란 눈이 박혀있었다. 그것은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가 들어 올리는 순간마다 영롱하게 빛난다. 브루스는 그 눈동자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싶게 만드는 색이었다. 그의 몸에 걸쳐진 하얀 망토와 가슴에 박힌 문양보다도 인간의 것 같지 않은 그 푸른 눈동자가, 그가 바로 인류의 주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침내 만나게 되었군요. 로드 슈퍼맨.”
“무슨 용건입니까, 웨인씨.”
무슨 용건이냐고. 브루스는 능구렁이 같은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치밀어 오르는 열을 삼켰다. 그동안 브루스는 수도 없이 로드 슈퍼맨과의 접촉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로드 슈퍼맨은 바쁘다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로드 슈퍼맨은 브루스의 목적과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슈퍼’한 귀와 눈을 가진 외계인이니까 오히려 모른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고 통제하고 있으며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에. 브루스가 이렇게 메트로폴리스에 있는 저스티스 홀에 방문하게 된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저스티스 홀’이라는 이름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힘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정의를 부르짖는 꼴이란. 브루스는 그 모순적인 이름이 붙은 건물에 서 있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는 철저하게 로드 슈퍼맨에게 몸을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소한 오해로 로드의 군대가 고담의 자경단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별 것 아닌 일로 괜히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서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테니 자경단들의 신변을….”
“오해였든 뭐든 간에 그들은 로드의 군대와 충돌했고 고담의 치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이 자경단인지 반란군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군요. 미안하지만 자경단들을 넘겨줄 순 없습니다.”
“로드 슈퍼맨, 그들은 모두 고담의 시민입니다.”
“범죄자들도 모두 어느 곳의 시민이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로드,”
”도시의 치안과 보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혹시 웨인씨에게는 도시의 안전보다도 우선할 것이 있으신 건가요?”
그 이외의 의도가 자경단에게 있냐는 것이다. 로드 슈퍼맨은 생각보다 단호하고 노골적이었다. 브루스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럴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젊고 어리기 때문에 대담한 것일까. 조심성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는 브루스 웨인을 의심하고 있었고, 그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노련했다면 확실한 증거를 위해 의심을 숨겼을 테지만. 그리고 로드 슈퍼맨의 말로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고담의 자경단들이 구류된 것은 브루스 때문이었고, 그들이 풀려날 수 없는 것도 결국 자신 탓이었다.
어쨌든 그의 입에서 전해들은 ‘도시의 치안과 보호’는 브루스에게 분노를 일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력으로 정복한 외계인인 주제에 그런 단어들을 잘도 입에 올린다. 브루스의 심장은 분노로 인해 그 움직임을 빨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의 귀에는 분노와 슬픔이 적절히 섞인 고동으로 들릴 것이다. 실제로는 시커먼 분노가 속을 태울 것처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로드 슈퍼맨에게 솔직한 감정을 전해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현혹해야 한다. 고담의 황태자로서 수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브루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로드 슈퍼맨의 망토를 잡는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망토를 잡아든 손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입술로 가져갔다. 망토자락에 입을 맞추며 브루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들이 자경단에 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을 말렸더니 그 철없는 녀석이, 도시를 지킨답시고 자경단에 들어가서…. 로드 슈퍼맨, 제발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부드러운 손이 턱을 잡아 고개를 위로 향하게 만들었다. 하염없이 부드러운 손짓이었지만 그 손이 발휘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힘을 브루스는 안다. 브루스는 그 손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결국 도시의 안정이 아닌 사적인 것을 위한 부탁이었군요. 브루스 웨인. 당신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자경단을 풀어달라 말한다면, 제가 그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개인적으로 얻게 되는 건 뭐가 있죠? 로드의 군대에 맞서고, 로드에게 손해를 입힌 그 사람들을 살려준다면.”
“당신께 모든 걸 드릴 수 있습니다, 로드 슈퍼맨.”
“물론 고담의 그 ‘웨인’의 재산이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 사람은 저 밖에 몇이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로드들은 아니죠. 특히 내겐 다이아몬드도 흑연 따위나 다름없으니.”
브루스의 턱을 잡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치켜들어져 헉, 하는 거친 숨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목에 가해지는 충격보다도 매서운 것은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혹은 뜨겁게 녹여버릴 거 같은 파랗고 파란 눈. 그것은 괴로움으로 헐떡이는 브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구의 온 바다와 하늘을 녹여 만든 듯한 그 눈 속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흥미롭다는 듯 로드 슈퍼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그의 입모양은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로드 슈퍼맨에게 잡혀있는지라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지만 브루스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호흡곤란으로 인해 살짝 흐려졌던 시야는 눈꼬리를 타고 뺨 아래로 떨어진 물방울 덕분에 맑아졌다.
그 어떤 굴욕적이고 싫은 일이라 해도,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브루스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딕! 세상에, 너 괜찮은 거야?”
“돌아왔군요. 딕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알프레드, 바바라.”
자경단은 로드의 군대에 의해 억류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되어서야 풀려났다. 꾀죄죄하고 잔뜩 마른 형상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미소는 변한 것이 없다. 알프레드에게 배가 고파 죽겠다고 칭얼거리는 것을 보면 크게 다친 부분도 없는 것 같았다.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었지만 자경단은 로드의 군대와 의견을 같이 모으고 있는 집단이 아니었기에 육체적인 탄압이 없었다는 것은 의외였다. 더군다나 그 자경단을 이끌고 대립을 주도하는 딕의 상태가 멀쩡하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딕을 위해 요기할 것을 가져오겠다고 알프레드가 부엌으로 향하고, 바바라는 그를 크게 포옹하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누가 보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 상봉으로만 보일 모습이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상태로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의 내용만 아니었다면.
“저택 주변에 저 정찰기와 군인들은 뭐야? 자경단이 그냥 풀려난 게 아니었구나?”
“삼일 전부터 감시가 늘었어. 자경단에 대한 의심과 혐의가 사라진 게 아니란 건 바로 알겠지? 앞으로 행동을 조심해야해. 렉스와의 통신도 한동안 중단하기로 했어. 브루스가 새로운 루트를 알아본다고 했고.”
“그럼 자경단은 대체 어떻게 풀려난 거야? 브루스는 어디 있어?”
“메트로 폴리스의 저스티스 홀.”
바바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딕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그의 얼굴을 누구보다 다정하게 쓸어내리는 바바라의 표정은 손길과 다르게 무척이나 차가웠다.
“고담 자경단은 브루스와 교환된 거야. 표면상으로는 저스티스 로드와 웨인 기업의 협력을 위해서라지만. 글쎄, 로드들이 유일하게 애먹는 도시인 고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갔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인질이지.”
그들이 브루스가 저항군의 수장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 해도 말이야.
바바라의 손가락이 딕의 손바닥에 단어를 그렸다. 아무런 자국조차 남지 않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딕의 표정에 미소는 한자락도 남아있지 않았다.
- 계속?
그저 배틀 호모 한 장면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