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플 로이스를 잘 달래어 식당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손에는 방금 내려 뜨끈한 커피를 들고 로이스에게 돌아가려는 브루스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로이스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방금까지 그녀가 열심히 두들겨대던 노트북과 두꺼운 공책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중요한 논문이라고 했던 그것들을 그대로 둔 상태로 로이스가 테이블을 비운 것이다. 반쯤은 황당한 기분으로 카페 안을 둘러본 브루스 눈에는, 그들이 앉아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테이블 앞에 선 로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몸을 수그린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는 상태였다. 브루스는 거침없이 다가갔다.
“로이스, 여기서 뭐해?”
“잠깐 아는 얼굴이 있어서 인사하러 왔지. 여기는 내 오빠 브루스야, 그리고 여기는….”
앉아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잔뜩 숙이고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니 키가 불쑥 커졌다. 상당히 큰 키에 속하는 브루스보다도 더 컸다.
“저는 클락, 클락 켄트라고 합니다.”
두꺼운 안경을 허둥지둥 올리고, 브루스를 향해 뻗은 손동작이 조금 어색해보였다. 브루스가 악수를 위해 내어진 손을 빤히 내려다보니, 안경 건너의 볼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커피를 들지 않은 쪽의 손으로 브루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착각인지 몰라도 왼손에 들린 커피의 온도보다, 그의 손바닥이 더 뜨거웠다.
일부러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았는데 둔한건지 손 힘이 좋은 건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잘 부탁한다고 손을 두어 번 흔들자, 클락이라는 그 남자는 허리까지 접어가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얼굴은 어느새 뺨뿐만이 아니라 목덜미까지 붉게 익어있었다. 거기까지 본 다음에 머리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였다. 로이스의 남자친구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
지금까지 브루스가 알고 있던 로이스의 남자친구는 이런 타입이 아니었다. 로이스의 취향은 능글맞다고 느껴질 정도로 뻔질뻔질한 성격에 유능한 냄새가 풍기는 남자였다. 마초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선수계열, 그게 아니면 말 잘하고 뽐내기 잘하는 학생회장 같은. 제 소중한 동생인 로이스가 사귀는 남자라면 뒷조사까지 불사했던 브루스였기에, 그가 모르는 그녀의 남자친구는 없었다. 남자친구를 비롯해서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던 남자애들도 모조리 그런 타입이었으니까, 로이스의 취향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클락이란 남자는 절대 남자친구가 아닌 것이다. 물론 체격적인 조건, 키 크고 덩치 좋은 것은 그녀 타입일지도 모르나 성격에서 탈락이다. 클락은 아까부터 브루스의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숙맥에다가 소심한 성격. 브루스가 판단한 그의 성격은 그러했다. 처음만난 사람과 인사하는 것을 어색해하고, 힘들어한다. 확실히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나 대담한 성격을 좋아하는 로이스의 상대는 아닌 것이다.
(후략)
<신간> <가제> '스몰빌의 휴일' -???
* 책 사양 *
크기 : a5
수위 : 19세 미만 구독 불가
분량 : 100쪽 내외 (예정)
출력 : 떡제본
가격 : 9,000원 (예정)
주의사항 : 히어로가 없는 세계관입니다. 클락이랑 브루스 둘 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노팅힐 모티브 입니다.
* 샘 플 *
뜨거운 여름의 태양 볕이 내리쬐는 탓에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피부는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만하면 됐다고 이제 가자고 소리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클락은 알았다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도 숙여진 허리를 들어 올릴 줄 몰랐다.
세상이 좋아져서 몇 사람이 한참이나 일해야 할 농사일을 온갖 기계들이 대신 해준다지만, 기계가 휩쓸고 간 자리에도 남아있는 옥수숫대들을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었다. 클락은 흙바닥에 누워 녹색 이파리 사이로 노랗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옥수수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떨어진 옥수수들을 품 한가득 주워, 자루에 밀어 넣는 팔뚝에 단단하게 힘줄이 섰다. 마침내 한 자루 가득 채워 단 하나의 옥수수 알갱이도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야 클락은 허리를 폈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는 마치 오븐에서 잘 구운 빵처럼 보기 좋았다. 커다란 몸을 숙이고 한참이나 작업에 몰두해있던 탓에 저릿저릿함이 느껴지는 허리를 반대쪽으로 한껏 스트레칭해주고, 클락은 자루를 들어 옮겼다.
옥수수 수확 트랙터에 납작해진 녹색 이파리와 수숫대들이 흙과 뒤엉켜 밟을 때마다 푹신한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흙과 풀과 어우러져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할 때는, 세상에 두고 왔던 온갖 복잡한 일들이 저 멀리 딴 곳의 이야기인양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빽빽한 건물과 도로가 정신없이 내달리는 도시가 아니라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보드라운 흙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촉한 흙을 밟으며 느긋하며 여유롭게. 결국 스몰빌 출신은 이래도 저래도 스몰빌일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커다란 자루를 트랙터에 싣고 클락은 저를 기다려준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뒷좌석에 올라탈 예정이었다. 잠자코 엉덩이를 붙이고 집까지 편하게 가려던 참에, 언제부터 울린 것인지 모르는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윙윙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흙이 묻은 손을 옷자락에 문지르고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하려니, 화면에 ‘편집장’이라고 적힌 세 글자가 갑자기 숨이 먹먹하게 만든다.
순식간에 제가 올라가 있던 트랙터가 거대한 도시인 메트로폴리스로 향하는 버스같이 느껴졌다. 한참 고향의 정취에 빠져있던 클락에게 반가운 전화는 아니었으나, 피할 수도 없는 것이 봉급쟁이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현재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면 절대 피할 수 없는.
클락은 어머니께 따로 걸어가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트랙터에서 내렸다. 트랙터는 탈탈 거리는 거친 소리를 내며 밭을 갈랐다. 커다란 기계가 소음을 내면서 흙먼지가 뿌옇게 일으키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에 전화가 끊겨버렸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연락을 받지 않고 스몰빌에 잠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클락은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을 대충 쑤셔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트랙터가 사라져 조용해진 들판을 걸으며, 클락은 전화가 오기 전 옥수수들을 수확하며 맛본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클락은 오랜만에 고향인 스몰빌에 내려와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는 것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클락이 반강제로 스몰빌에 내려온 이유는 회사에서 받은 징계 때문이었다. 신문사에 영향을 끼치는 스폰서의 입맛에 맞지 않은 기사를 실은 죄로.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