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브루스AU] 그 칠판의 그림자 04
단편에서 연재로 옮겼습니다
완결만 나면 쩜오에 책으로 나올 거 같네요!!!
중요한 것은 완결이 나면.. (._.
아 여기에 등장하는 친구 지미는 무비에 잠시 나왔던 지미로 생각해주세요(
그 배우가 너무 잘생겨서 그냥 가져다 썼습니다
4.
눈을 뜬 것은 휴대폰에서 요란하게 울린 알람 때문이었다. 클락은 눈을 감은 상태로 곁의 선반을 더듬더듬 만지는데 휴대폰이 잡히질 않는다. 잡히는 건 오로지 제 안경뿐이어서, 아직도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겨우 뜨고 소리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탁자위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찾았다. 오전 7시, 기상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버튼을 눌러 소리를 끄고 길게 하품을 하고, 잠을 깨우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 거울 안에는 졸음에 가득 물든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어제만 해도 이 욕실 거울 앞에서 얼마나 떨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든다. 깨끗하게 세수를 한 클락은 얼굴과 목덜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혹시나 자는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발소리를 죽였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니 조금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을 고민할 때였다. 숨소리를 내며 곤하게 잠들어 있던 사람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새집처럼 뻗친 머리와 아직도 꿈 속 세상에서 헤매는 듯한 멍한 눈빛에 웃음이 나온다. 클락은 살짝 그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도통 웃음이 멈추질 않아 입가에는 환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깼어요? 7시에요. 피곤하면 더 주무셔도 되는데.”
“…내가 여기서 잤군.”
방금 잠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아니면 늦게까지 신음을 내질렀기 때문에 잔뜩 쉰 목소리가 섹시했다.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을 받은 브루스의 눈동자가 노란빛이 감도는 옅은 갈색으로 빛난다. 부드럽게 뻗은 콧날과 뺨에도 뽀얀 햇살이 내려 앉았다. 클락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잠에서 깨기 위해 몇 번이나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브루스가 클락에게 고개를 돌린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햇빛을 받으니까 눈이 참…. 예뻐서….”
자기가 말하고도 양 볼에 따끈따끈 열이 올라온다. 괜스레 선반 위의 안경을 찾아 얼굴을 가릴까 고민한다.
“네 눈이야 말로, 새파래가지고.”
“제 눈이 왜요?”
자기가 잘 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묻는 클락에게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은 브루스는,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이불을 젖힌다. 잠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하얀 몸이 드러났다. 클락이 잠들기 전에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 놓아서, 정사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클락에 의해 생긴 가슴팍의 붉은 입술 자국들이나 허리의 손자국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보고도, 브루스가 이불을 들추어낸 덕에 고스란히 내보이는 그의 나신에 클락은 얼굴을 붉었다. 근육이 붙어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붉은 자국이 가득한 가슴팍이 계속 클락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소 노출하지 않아 하얗기 만한 살갗에 혀를 대었을 때, 굉장히 부드러웠다. 지금은 얌전한 척 몸을 숨기고 있는 작은 유두는 너무 촉촉해서 녹아버릴 것 같을 정도였다. 탄력 있으면서 푹신하게 감겨오던 근육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머문다. 눈으로 그의 몸을 홀린 듯 핥던 클락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은 브루스의 무심한 한 마디였다.
“뒤처리를 한 건가?”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수건으로 조금 닦았을 뿐인걸요.”
“쓸데없는 짓을 했군.”
“네?”
이번에도 답변은 없다. 브루스가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문이 닫히고 매끈하게 빠진 그의 다리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클락은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자기가 무언가 잘못했던 걸까 생각을 한다.
샤워하는지, 물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클락은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자신의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호텔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지와 니트를 꿰어 입고 안경을 올려 쓰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이어서 클락은 주변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웠다. 어젯밤 브루스가 벗어던진 것들이었다. 속옷과 바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티셔츠를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천에 살짝 코를 묻으니 그가 쓰는 특유의 향수 냄새가 난다. 청량한데 깊이 있는 향이 은은하고, 포근하다. 무슨 향수를 쓰는 걸까.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꼭 그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소리가 멈추는 것을 듣고, 클락은 허둥지둥 티셔츠를 접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문이 열린다.
물기를 닦아낸 브루스는 어제와 같이 알몸이었다. 테이블 앞에 서 있는 클락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그가 정리해둔 옷을 입기 시작했다. 클락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움직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속옷을 입기 위해 다리 한 짝을 들어 올리는데 그 탓에 허벅지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작은 엉덩이가 천안으로 사라지고 곧이어 탄력 있는 허벅지와 종아리도 모습을 감춘다.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은 목덜미와 가슴팍과 늘씬하게 빠진 복부가 마지막으로 눈앞에서 사라진다. 숨 쉬는 법도 잊고 옷 입는 장면을 보면 클락은 그가 신발 신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린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오전에 수업 있어. 옷 갈아입고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해.”
“그렇군요….”
티내지 않으려고 해도 줄줄 흘러내리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목소리가 애처로웠을까.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버릴 것만 같았던 브루스가 멈칫한다. 물론 표정에는 짜증과 귀찮음이 몹시 담겨 있지만. 할 말이 있냐는 물음엔 시비를 거는 듯한 뉘앙스까지 담겨, 클락은 잠시 움츠러들었다가도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다. 왜 자신의 행동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는지 묻고 싶었고,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나가버리려는 것이 서운하고, 적어도 함께 앉아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 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냥,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
“뭐?”
“교수님, 아니, 브루스랑 같이 있고 싶다고요.”
그 말 하나 뱉을 때 이렇게까지 긴장 할 일은 뭐란 말인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입을 조금 벌린 상태로 어이없는 눈빛을 한 브루스의 반응을 보면. 그런데 이내, 그 차갑던 표정이 천천히 풀리더니 입 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작게 웃는 얼굴이 편안하고, 조금은 즐거워 보여서 클락은 이유도 모른 채 함께 미소를 짓는다.
“넌 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흥미롭다는 듯이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버리고, 브루스는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뭘 하고 싶은지, 그건 클락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를 보면 가슴이 뛰고, 시선을 돌릴 수가 없고 몸이 동하고 마음이 동해서 섹스까지 해버렸다. 조금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클락의 강요로 그런 관계를 맺게 된 거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에 클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후의 행동,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이는 클락을 보며 브루스가 문고리를 돌린다.
“어쩔 수 없는 애송이군.”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브루스가 나가버린 그 빈 호텔 방에서, 클락은 한참이나 더 앉아 있어야만 했다.
* * *
“내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요즘 너 이상하다?”
입으로는 질문을 하면서도 시선이 똑바르지 않다. 클락의 이상한 모습을 본 친구가 의아하게 여길만 했다. 점심시간마다 붐비는 햄버거 가게였다. 지미는 커다란 햄버거를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는 부지런히 감자를 집어먹으며 인상을 썼다.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다. 지금 클락은 햄버거를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그저 손으로 들고만 있기 때문이다. 엄청 좋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먹어지질 않았다. 머릿속으로 브루스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만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비웃음이 가득한 웃음소리와 차갑게 묻던 질문의 내용까지도. 브루스가 웃어버린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조금의 깊이 있는 생각도 없이 그저 같이 있고 싶다는 즉흥적인 말에 대해 비웃은 것이었다. 그의 질문에 뭐라도 대답했어야 했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한숨을 내쉬는데, 지미가 덩달아 햄버거를 내려놓는다.
“너 숨기는 거 있지? 어제도 말도 없이 외박했잖아. 저녁때부터 대체 어디가 있던 거야? 옆 방애들하고 노는 줄 알았는데 걔네들도 모른다고 하고.”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엄청 수상한데. 원래 다른 애들이랑 놀거나 일이 있을 때는 나한테 다 말하고 갔잖아. 혹시 나 몰래 만나는 여자라도 있냐?”
지미가 말한 만난다는 건, 아마 사귄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인. 서로 사랑하여 만나는 사이. 실제로 클락은 그에게 사랑과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이 그 사람으로 가득 차고, 성욕을 느끼며 가슴이 떨리는 것과 같은. 그러나 브루스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클락이 서운할 정도로.
“어어? 말 못하는 거 보니 진짜인가 보네? 누구야? 내가 아는 얘야?”
“그런 거 아냐. 그냥….”
“뭐가 그런 게 아니야? 빨리 말해봐. 그동안 내가 네 연애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냐? 나한테는 당연히 말해줘야지!”
클락은 잠시 말문이 막힌다. 사실 지미는 고등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이기 때문에, 그동안 클락이 사귀었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었다. 모두 여자였고, 또래였으며 그 중에는 지미의 친구라 그가 도움을 준 관계도 있었다.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클락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기 때문에, 말 많고 발 넓은 지미가 훈수를 두곤 했다. 이번에도 지미는 그때처럼, 클락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물론 클락이 '여자'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 틀렸지만.
그러나 클락은 조금, 그 도움이 고프기도 했다. 그 동안 클락이 만나왔던 사람들과 브루스는 너무 달랐다. 그는 클락보다 키가 훌쩍 컸고, 열 살 정도 연상이었다. 남자를 만나는 것이 익숙해 보이고 스킨십에는 적극적이지만 마음은 거부한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클락은 고민이 많았다. 혼자서 끙끙 고민하는 것보다 자칭 연애 박사라는 친구의 도움이 더해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고민하더니, 클락이 의자를 움직여 지미에게 바짝 다가간다.
“사실 내가 계속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거든. 어쩌다보니 스킨십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자꾸…. 생각이 나서. 그래서 좋아하는 거 같다고 그 사람한테 말했더니 착각이라고 차갑게 내치지 뭐야. 홧김에 아니, 내가 졸라서…. 아무튼 어쩌다보니 다시 스킨십을 했는데….”
자세한 정보를 알리지 않고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하는데도, 클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정말 어이없고 황당한 서사가 아닐 수 없다. 구강성교를 ‘스킨십’으로, 협박을 ‘졸라서’, 섹스를 ‘스킨십’으로 바꾸어 말하는데도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말로 정리를 하려고 보니 제가 벌인 일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었는지 더 잘 느껴진다. 저를 바라보는 지미의 눈 때문에 더 그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아무튼 스킨십 후에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더니 대체 자기랑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말하면서 차갑게 나가버렸어. 나는, 아직도 그 사람 생각밖에 안 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그냥….”
“당연히 그 사람하고 사귀고 싶은 거 아니야?”
이제는 클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멈춘다. 교수님과, 브루스와 사귄다는 것이 가능할까. 지금까지 클락이 사귀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지만, 그들과 어떤 식으로 만남을 가졌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손을 잡고 걷고,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더랬다. 주말이면 서로의 집에서 만나고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해 나누어 먹으며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가끔 만나지 못한 날이면 밤새도록 전화통화를 하며 그리운 목소리를 듬뿍 들었던 그런 것들. 그런 순간들을 브루스와 공유할 수 있는 걸까. 멍하니 상념에 빠진 클락을 내버려두고, 지미는 입 안에 기다란 감자를 쑤셔 넣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게 되었다며. 그 사람이 착각이라고 하니까 화를 낸 것도, 넌 더 깊고 진지한 관계를 원하니까 그런 거잖아. 연인 관계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어야지!”
“고, 고백을 하면 될까?”
클락은 아까보다도 훨씬 더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브루스의 모습과 연인이라는 키워드가 가득했다. 심지어 상상 속의 브루스는 자신과 다정한 연인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부드럽고 웃으며 클락의 손을 잡아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심장은 벌써부터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거 어때? 음식 맛있는 곳에서 즐겁게 식사하고, 가슴이 뛰는 로맨스 영화도 한 편 보란 말이야. 그 다음엔 분위기 좋은 술집에 가. 거기서 손 딱 잡고, 당신과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거지!”
“그 사람이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 감정을 착각이라고 치부하면서 무시했는데….”
“그래도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해야지! 고백하지 않으면 후회할걸?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는 게 낫지.”
동의한다는 의미로, 클락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안경 너머의 파란 눈이 반짝 반짝 빛났다. 벌써부터 발그레한 양 뺨을 보며 지미가 웃었다.
“와, 이게 대체 뭔 일이냐. 너 정말 단단히 빠졌나보다. 그 보수적이고 담백하기로 유명한 클락 켄트가 사귀기도 전에 스킨십부터 해대는 것도 그렇고. 정말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지?”
“미안. 그건 말하기가 조금 그래. 나중에 잘 되면 알려줄게.”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예쁘냐?”
“…진짜 섹시해.”
솔직한 감상이 묻어나는 클락의 대답에 지미가 와하하, 하고 크게 웃어버린다. 클락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벌써부터 어떤 식으로,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식당이며 영화관, 술집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어느새 다 마셔버렸는지, 빨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음료수를 밀어놓으며 지미가 말했다.
“내가 특별히 도와줄게. 친구를 위해서.”
* * *
브루스 웨인의 교수실 앞에서 클락은 떨리는 손을 몇 번이나 진정시켜야만 했다. 지미와 함께 데이트 코스를 모두 정하고, 예약은 자기가 맡아주겠다면서 등 떠민 지미 덕에 클락은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고 다음 수업시간까지 30분가량 남아있을 시간이었다. 분명 브루스는 아직 여기에 있을 것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려다, 손에 땀이 배어나와 바지에 문지르기를 몇 번. 다른 사람이 봤다면 교수에게 엄청나게 혼나는 학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클락은 그저 가슴이 쿵쿵거리고 파도처럼 밀어오는 긴장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문을 두들기는데, 잘못 했는지 소리가 너무 작게 났다. 다시, 또 다시 문을 쿵쿵 치니 안에서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정말 반갑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은 브루스가 클락을 응시한다. 가느다란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플한 테와 겹쳐져 보이는 눈썹이 잘생겼다. 코 위에 가볍게 올라간 진한 색의 테가 그의 쭉 뻗은 코의 섬세한 생김새를 더욱 강조해주는 모양이었다. 클락을 바라보느라 안경테를 살짝 밀어 올리는 손놀림이 우아하다. 저런 가느다란 형태의 안경도 괜찮겠다고, 클락이 생각할 참이었다. "무슨 일인가, 켄트." 브루스의 목소리에 클락은 화들짝 놀라버린다.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어물거리는데 그가 시계를 살핀다. 바쁘다는, 혹은 시간이 아깝다는 제스쳐에 클락의 애가 탄다.
“내일, 토요일에 바쁘세요?”
“난 언제나 바빠.”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에 클락의 입이 막혀버린다. 당황해서 눈을 끔뻑이는 클락을 보고 브루스는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버린다. 신경질적인 표정에 초조한 클락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간다.
“할 일이 없나? 용건이 있으면 말하고 그게 아니라면,”
“데이트해요, 교수님.”
“뭐?”
“아니, 브루스. 저랑 데이트 해주세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린 그 얼굴을 보니 가슴이 더 벌렁거린다. 제발, 제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는 클락의 손이 주먹을 꼭 쥐고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브루스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니, 한 손으로 안경테를 잡아 벗어 내린다. 커다랗고 기다란 손이 섬세하게 움직이는 동작이 멋있어서, 책상에 내려놓는 동작까지 모두 훑는다. 여유 있고 느긋한 손놀림과 다르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다.
“내가 왜 너랑 데이트를 해야 하지?”
“그러지 말고, 한 번 만요. 네? 내일 저녁에 시간 좀 내주세요. 제발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완전 멋있게 하려고 생각해두었던 멘트들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언제나 다름없이 조르고 애원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런 식이면 애송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수업하러 가야하니까, 나가.”
“데이트 해주신다고 하면, 나갈게요.”
사실 클락도 수업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공 교수님의 과목이라 반드시 들어가야 했지만 지금 클락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여기 혼자 있던가.”
“허락해주시지 않으면, 강의실까지 따라 갈 거예요!”
브루스가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으로 손을 뻗는데, 클락이 조금 더 빨랐다. 황당한 얼굴을 한 브루스에게 재킷을 가져가 옷 입는 것을 돕는다. 클락이 뒤에 서니 그가 자연스러운 포즈로 팔을 끼워 넣는다. 어딜 보나 시중 받는 것에 익숙한 모습이 또 한 번 속을 태운다. 몇 명의 사람들이 이렇게 그를 도왔을까, 하는 질투에서.
몸을 돌려 브루스가 재킷의 단추를 잠그는 모습을 본다. 주름 하나 없이 다려진 셔츠에, 오늘도 멋스러운 넥타이. 완벽한 재킷까지 걸친 그의 몸에서 오늘 아침에 맡았던 그의 향이 났다.
“몇 시.”
“…네?”
시선이 클락을 향하지 않았기에, 클락은 그의 말이 저를 향했는지 조금 늦게 파악해버렸다. 주어고 서술어고 모두 생략되었지만 클락은 브루스가 무엇일 가리키는지 알았다. 눈이 절로 커지면서 입가에 웃음이 잡혔다.
“5시요. 장소는 그때, 저를 태워주셨던 곳에서….”
“난 늦으면 안 기다려.”
“제가 왜 늦겠어요, 빨리 가 있을게요!”
끝까지 브루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클락은 그것마저 좋아 죽을 거 같았다. 그를 따라 교수실에서 나오고도, 그 뒤를 졸졸 따르자 브루스가 빨리 네 갈 길로 가버리라고 손을 저어버린다. 그 손을 잡고 손가락마자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브루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클락은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뛰었다. 발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