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브루스AU] 그 칠판의 그림자 02
제대로 된 씬이 없었다는 말씀에 다시 조금 써봤는데 어쨰 이편에도(
이상하게 내용이 길어지네여 허허 완결만 내면 책 나오겠는걸...(._.
바람이 불었다. 어깨를 떨게 만드는 그런 차갑고 거센 바람은 아니었다. 머리칼을 적당히 흔들고 지나갈 정도의 선선한 바람. 클락은 그것을 맞으며 십 분이 넘게 서성이고 있었다. 항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했던 건물 앞에서 클락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수업 시간이 다가올수록 교실로 향하는 학생 수가 늘어났다. 물길처럼 밀려들어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클락은 입술을 몇 번이고 짓씹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택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교실에 들어갔음에도, 어느새 클락의 지정석이 되어버린 자리는 비어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준비해온 책과 공책을 꺼내는 순간에도 심장이 세차게 두방망이질을 한다. 사실 계속 그랬다. 골목길에서의 사건 이후 그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머릿속에 웨인 교수가 나타났기 때문에, 며칠간 클락은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클락은 그 골목길에서 결국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와의 헤어짐이 기억나지 않는다. 인사를 했던가? 술에 취한 교수를 밖으로 안내해 주었던가? 분명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때의 클락은 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클락에게 저를 데려가 달라고 우는 소리 하던 친구의 존재마저 까맣게 잊어, 그 다음날 오전에 원망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친구에게 미안한 맘을 느끼거나 할 겨를도 없었다. 오로지 클락의 머릿속에서는 정액을 입 안에 머금은 상태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만이 생생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떠오르는 그것에, 힘이 들어가는 아래를 진정시킬 뿐이었다.
너무 독특하고, 겪어서는 안될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도 진정되기는커녕 날짜를 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놀랐다. 웨인 교수를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클락은 수업에 빠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를 나면 오히려 더 이상한, 안 좋은 방향으로의 싹이 자라날 것 같았다. 그것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 날 하루에만 몇 번이고 반복한 그 결심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시간이 다가오자 몇 번이고 시계를 살피고, 강의실로 이동하는 학생들을 연거푸 쳐다보게 되더라. 그리곤 나중엔 그래도 수업인데, 학생의 본분을 생각하면 들어야 하는 않나, 하고 가야하는 당위성을 내보인다. 덧붙여 오늘 가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혼란스럽다면 다음 주도 그리고 그 다음 주도 빠질 것인가에 대핸 고민을 했다. 학점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핑계가 그 무엇보다 설득력 있게 자신을 속인다. 결국 클락은, 여느 때처럼 소란스러운 강의실 한복판에 앉아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끌어안고 그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웨인 교수가 들어왔다.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강단에 올라선다.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검은색의 양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오늘도 완벽한 머리스타일과 깨끗하게 관리된 구두, 손에 든 깔끔한 가방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많은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의 시선을 받고 있는 그가, 골목길 한 가운데서 천박한 말을 내뱉으며 타인의 성기를 빨았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제 눈으로 보고, 그 성기의 주인이 되었던 클락조차 그것이 헛된 망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클락은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부정한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클락은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기 전, 버릇처럼 교실 전체를 둘러본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많은 학생의 사이에서 클락은 그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언제나처럼 클락이 앉아 있는 쪽을 시선으로 훑을 것이고, 그 사이에 앉아있는 클락을 볼 것이다. 찰나처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둘에게 있었던 그 순간에 대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일지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클락의 머릿속을 점령한 그 까만 밤의 기억을, 교수는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
웨인 교수와 시선이 마주칠 그 타이밍을 기다리며 클락의 심장이 크게, 아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학생에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클락의 그 기대가 무색하게, 웨인 교수는 클락의 눈빛을 자연스럽게 피해버리고 만다. 클락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 그대로 매몰차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클락을 없는 존재로 치부해버린 것처럼. 백명이 훌쩍 넘는 학생들 모두에게 시선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의실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이제 클락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한명의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수업을 빠져야 할지, 교수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봐야할지 고민했던 시간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클락은 그의 눈빛이 의도적으로 저를 향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때의 일을 없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니 뱃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분필을 쥔 손가락이 클락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두 시간 동안의 수업 내내, 또 다시 교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 *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러 온 학생들에게 대답을 해주는 통에, 웨인 교수의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강의실에 남아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강의실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평소와 다르게 클락은 제 가방을 챙겨 교수에게 향했다. 다가갈수록 그가 쓰는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먼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말끔한 어깨와 책을 집어 드느라 힘줄이 돋아난 손등에 시선이 갔다. 클락은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났다.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클락은 자신의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 나가는 것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아 갈라져 몹시 형편없이 들렸다. 조금 목을 가다듬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무슨 일이지?”
교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한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에, 클락은 맘속에 돌이 얹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친절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주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불쾌감으로 숨이 막힐 것 같지만 다른 학생들을 대할 때와 이질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에서 정체 모를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여기서 할까요?”
교수의 얼굴이 클락을 향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클락을 쏘아본다. 그 눈빛에서 클락은 또 동요하는 심장을 느낀다. 캐러멜의, 아니 오늘은 그것보다 더 진한 초콜릿색과 같았다. 그의 눈빛은 왜 이렇게 달콤하고 씁쓸한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걸까. 클락은 알 수가 없었다. 교수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강의실을 떠났지만 몇 명이 아직 안에 남아있었다. 강의를 위해 소리를 울리게 설계한 건물인지라 앞에서 하는 대화는 곳곳에까지 퍼질지 모른다. 교수는 그것을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짧게 한숨을 쉬더니 클락에게 말한다.
“따라와.”
가방을 든 웨인 교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넓은 등을 감싸고 엉덩이로 떨어지는 재킷이 오늘도 깔끔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옷자락으로 계속 시선이 간다. 그 아래 쭉 뻗은 다리는 무척 길고, 긴만큼 걸음은 빠르다. 근육이 눈에 띄게 발달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가느다랗게 뻗었다. 정장 바지가 잘 어울리는 이유가 그에 있는 듯하다. 걸음이 빠른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클락 또한 보폭을 넓혀 뒤를 쫓았다.
강의실에서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교수실이었다. 교수가 여는 문에는 브루스 웨인, 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클락이 들어가고 교수가 문을 닫았다. 교수실은 좁지만 깔끔했다. 두개의 벽면은 책이 빼곡한 책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책상에는 온갖 노트와 자료가 올라가 있고, 평소 많은 시간을 앉아서 보낼 의자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세 명이 빠듯하게 앉을 법한 소파는 손님 대접이나 학생 상담을 위한 것이리라. 교수는 손짓으로 클락에게 앉으라고 지시하고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 그리곤 질문이 뭐냐는 무심한 말을 하는 바람에, 클락은 미처 앉지도 않은 상태로 멀거니 서서는, 수업 시간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참지 못하고 툭 던졌다.
“교수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교수의 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클락은 섭섭함과 속상함을 닮은 감정이 가슴팍에서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조금도 헤어 나오지 못했는데. 며칠 동안 그 일만 생각하고 다시 만나는 것을 남몰래 기다렸는데. 생각해보면 일을 저지른 사람도 교수였다. 클락이 한 것이라고는 위험한 일에 휘말린 사람을 구해주려는 시도와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수를 보고 놀라 그에게 난폭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조금 했을 뿐. 어쨌든 그 사건을 잊지 못하는 건 자신뿐이고, 교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그 골목길을, 자신을 떠올리지 않고 평범하게 지낼 수 있는 걸까.
“저는 아닌데, 교수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켄트.”
한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교수는 혼자 자리에 앉은 탓에 클락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클락은 그 구도에서 또 다시 지난밤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에, 거기에다가 왠지 모를 부끄러움까지 섞인 탓에 얼굴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마구 달아오르고 있는 클락을 보고 교수는 한숨을 쉰다. 큰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조금 거칠기도 했다.
“그 때의 일은 그대로 묻어.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클락은 그제야, 웨인 교수가 굉장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의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실수였어.”
“네?”
“그때는 내가 몹시 부적절한 행동을 했어. 그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술을 좀 많이 마신 상태에서 당신의 말에 발끈했고. 이제 와서 뭐라 한들 바뀌는 건 없을 테니 그냥 잊어줬으면 좋겠군.”
불편함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교수는 학생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기 때문에, 클락과 마주보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면했을까. 클락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교수는 정말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고 흘려보냈을 것이다. 지금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새카맣게 잊어버리라고. 정말 교수한테는 그것뿐일까.
“어떻게 그래요? 전 안된단 말이에요.”
“무릎이라도 꿇어줄까? 제발 없던 일로 해달라고. 그러면 되겠나?”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
사실 클락도 그 이후는 몰랐다. 그저 스스로에게 그 일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처럼, 교수에게도 특별한 일이었기를 바랐다. 교수가 자신을 특별취급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제자들 중에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은 가늠하기 어려웠고 앞의 교수는 쓰디쓴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욕구와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부딪힌다.
우물쭈물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클락을 바라보는 교수의 표정은 조금 착잡했다. 골치아픈 일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큰소리 칠 수도 없는 상황. 기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짚었다. 그 손가락마저 클락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이런 순간에도 깔끔하게 다듬어진 그의 손톱을 살피고, 치아에 깨물려 발갛게 변한 입술의 색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 정말 미쳤나봐. 클락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교수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상상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계속 교수님 생각이 나요. 며칠 동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그 때 생각만 난다고요. 꿈에서도 나오고 친구와 함께 있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그래서….”
분명 자기 얼굴은 지금 시뻘건 장작처럼 타올랐을 것이다. 클락은 거울이 없어도, 뺨에 손을 올려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아마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을까. 친구들과 놀이를 하던 중에 걸린 벌칙으로 가장 부끄러운 비밀을 말하게 된 적이 있었다. 왠지 그 순간에 다시 처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지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죄를 고백하는 듯한 클락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교수실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웨인 교수는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하고, 클락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눈을 껌뻑이는 클락을 한참 바라본 교수는 당황했는지 스스로의 입을 가로막는다. 그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는 건 클락의 착각일까.
“자극이, 흠, 조금 심했나보지. 요즘 금욕기간이 길었던 거 아닌가?”
“뭐라고요?”
“자꾸 생각난다며. 애인이나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 켄트. 그럼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나지 않을 텐데.”
클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치심과 민망함보다도 분노를 닮은 감정이 끓어올랐다. 쉴 새 없이 그가 떠오른다. 그것을 교수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연인이 없다면 파트너라도 만드는 게 좋겠군. 제대로 욕구를 해소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겠나.”
“절 발정난 짐승으로 보시는군요.”
“그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고 한 건 자네야.”
“달라요! 제가 교수님을 생각하는 건….”
대체 뭘까. 자신이 끊임없이 교수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단순히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클락은 그에게 특별하기를 바랐다. 그날의 기억 이후로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에 대한 미묘한 소유욕을 느끼기도 했다. 이와 가까운 감정을 알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분명한지, 클락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 감정으로 이름 붙여도 좋을까. 혹시 교수가 한 말이 옳은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적 없는 상대와 갑작스럽게 갖게 된 스킨십이 너무 강렬하고 자극적이어서, 그것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싫었다. 그를 보면, 상상하면 올라붙는 심장 박동이 고작 그 정도의 얄팍하고 싸구려 같은 반사 작용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클락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클락의 반응을, 교수가 유심히 살핀다.
“그럼 확인해볼까?”
어느새 수업을 할 때와 같이 단정한 얼굴을 하고, 교수가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확인이라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클락이 고민하는데 교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시계를 살핀다. 천천히 여유롭게 클락을 이해시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오늘 저녁에 바쁜가?”
“아뇨, 딱히….”
“오후 7시. 차로 데리러 오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에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눈을 끔뻑이는 클락을 보며 교수가 슬쩍 입 꼬리를 들며 웃는다. 매혹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미소에 클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클락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7시가 되기 훨씬 전부터 초조했던 감정은 초침과 분침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함께 달리는 기분이었다. 결국 약속 시간 10분 전에 장소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놓칠까봐 어딘가 들릴 생각도 못하고, 가방 끈만 주물럭거리고 섰다. 7시가 되고 교수가 오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나 5분이 넘겼을 때도 클락은 요지부동이었다. 교수가 자신을 바람맞힌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보다 자신이 들었던 시간과 장소를 다시 확인할 때, 클락의 앞으로 차 한 대가 매끄럽게 와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웨인 교수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언제나 보면 양복 차림이 아니었다. 어두운 색 면바지와 까만색 가죽 재킷이 굉장히 멋스러웠다. 캐주얼한 옷차림을 해서인지 몰라도 훨씬 젊어보였다. 이 정도면 클락과 또래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를 바라보며 멀거니 서 있는 클락에게 교수가 손짓했다. 그제야 클락은 후다닥 움직여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클락이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교수의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 채, 클락은 그저 눈만 깜빡인다. 뭐라 말을 붙이는 게 좋을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손끝만 만지고 있는데 빨간 불에 차가 멈춰 선다. 그때,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꼴은 뭐야.”
“어…. 이상한가요?”
클락은 언제나 입고 다니는 체크 셔츠 위에 남색 니트를 입은 상태였다. 평범한 학생들이 입고 다닐 만한, 그리고 클락이 자주 입는 옷차림이었다. 옷에 많은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지만 교수의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더 신경 써서 옷을 입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든다. 친한 친구들이 고등학생 같은 차림이라고 말했던 기억들도 떠오른다. 그냥 편하고 자연스러워서 입었을 뿐인데.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는데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셔츠는 벗고 위에 니트만 입어. 시력은 많이 안 좋은가? 안경 없이는 불편해?”
“그,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요. 안경이 없으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아요.”
알겠다는 의미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웨인 교수는 차를 타기 전, 아주 잠깐 클락을 봤을 뿐인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이 척척 나온다. 직업병인가,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교수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옷차림을 바꾸려는 자신을 떠올리니 그게 더 우습기도 하다. 뜬금없이 명령을 받는 것에 이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저에 대한 관심인 듯 보여서 좋았다. 생각해보면 단 둘이 어딘가를 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었다. 클락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거였나. 콩닥콩닥 뛰는 심장박동이 행복하다. 교수가 저를 이끌고 간 장소가 어딘지 알게 되기까지, 클락은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차를 한 교수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클락은 교수가 시킨 대로 셔츠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안경도 벗을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그대로 쓰고 있기로 했다. 안경을 끼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차의 문을 닫고 내린 후에야, 클락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어딘지 깨달았다. 친구를 데려가기 위해 왔던, 낯선 남자들을 쫓아내고 교수를 구해냈던 번화가였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클락에게 저 멀리서 교수가 손짓했다. 이런 곳에 왜 온 거냐고 따지려는 찰나, 교수의 시선이 클락의 가슴팍을 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셔츠를 벗은 탓에 드러난 부분이었다.
니트는 많이 파인 것은 아니었지만 삼각형 모양으로 가슴께까지 파여 있었다. 그 덕분에 클락의 목덜미를 훤하게 드러나게 했다. 노출이 심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셔츠와 함께 입었던 클락에겐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부분으로 교수의 눈길이 닿는다. 클락의 가슴 근육의 윗부분이 조금 드러난 곳. 그 시선을 인지하지 마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괜찮네. 꽁꽁 싸맨 것보다 훨씬 낫군.”
클락은 감사하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교수의 순수한 호의가 담겼을 시선과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달아오른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분명 친구들과는 아무런 문제없이 나누었을 대화였다. 옷이나 물건이 잘 어울릴 때나, 맘에 드는 좋은 것이 있을 때 칭찬해주던 것과 같은 내용인데도. 목덜미까지 달아올랐을 열기에 클락은 차마 자신이 하려던 말도 잊은 채 조용히 교수를 뒤따랐다.
둘은 가게들이 빼곡한 골목에서 간판이 없는 건물로 들어갔다. 밖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바였다. 실내는 가까이 앉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불빛만 켜있다. 적당히 끈적거리는 노래는 사랑을 속삭이기에 안성맞춤일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이런 곳에 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교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클락의 심장은 괜히 떨리기만 했다.
“교수님, 저….”
“여기선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웨인 씨나, 뭐 편한 걸로 불러.”
“그럼 브루스라고 부를래요.”
그가 슬쩍 눈을 돌려 클락을 쳐다본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걸까. 그래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로 승낙이었다. 좋을 대로 하라는 말에 클락은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환하게 웃었다.
자주 오는 곳인 듯 바의 바텐더와 이야기하는 브루스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클락은 그의 지시에 따라 바에 앉으면서도 열심히 곁눈질했다. 명도가 낮은 조명아래에서도 브루스의 잘난 얼굴은 참 보기 좋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깊어 보이는 눈빛 때문에 가슴이 설렌다. 그러더니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한다. 고개를 끄덕인 클락은 휘휘 걸어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달칵, 하고 클락의 앞에 잔이 놓인다.
“아, 감사합니다.”
“전 셀리나라고 해요. 브루스가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건 처음이네요.”
클락은 괜히 귓가 한번 긁었다. 처음 데려온 사람. 그 말에 알 수 없는 기대가 담겼다. 셀리나는 무척 흥미로운 것을 보는 눈으로 클락을 바라보았다. 클락은 문득, 브루스가 그녀와 무척 친근해보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교, 아니. 브루스와 잘 아시나 봐요.”
“조금요. 꽤 오래된 친구거든요. 뭐, 처음 만날 때는 친구사이가 목적이 아니었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친구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관계였다는 걸까. 듣고 나서 그들의 관계가 더 궁금해졌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물으려던 순간, 클락의 곁에 누군가가 인기척을 내며 섰다.
“혼자 오셨나요? 실례가 안 된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요?”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풍성한 붉은 머리칼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몸매를 강조한 원피스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평소라면 말을 섞어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브루스가 없는 틈을 타서 셀리나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중요했다. 클락은 일행이 있다는 말로 정중하게 그녀를 거절한다. 그리곤 곧장 셀리나에게 몸을 돌려 브루스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한 셀리나는 클락의 애간장을 태우며 적당히 대답을 해준다.
몇 개의 질문을 던졌을까. 클락이 브루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은, 저에게 일행이 있는지, 합석이 가능한지 물어본 세 번째 여성에게 거절의 말을 한 이후였다. 갑자기 안 좋은 기분이 스멀스멀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셀리나, 브루스는 어디에 있죠?”
“함께 얘기해보고 싶은 여성분이 없던가요? 다들 매력적인 분들이시던데.”
그녀의 말에 클락의 표정이 잔뜩 찡그려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브루스의 행방을 묻자, 셀리나는 맘이 콩밭에 있는 사람에게 뭘 하라는 거냐며 투덜거린다. 그리곤 그에게 순순히 털어놓는다. 브루스는, 클락에게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려 한 것이다. 셀리나가 내어 준 술은 이 가게 안에서는 언제든지 이성의 접근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브루스가 셀리나에게 그 음료를 내어주라 부탁한 뒤, 좀 더 편안하게 만날 수 있도록 친히 자리를 비켜준 것이란다. 일정시간 동안 만남이 성사되지 않으면 동성의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술로 바꾸어주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까지 모두. 클락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브루스는 옆방에 있을 거예요. 어쨌든 저는 할 만큼 했으니까. 가게 안에서 소란스럽게 만들지는 마요.”
셀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알려준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두운 바는 생각보다 넓어서, 코너 너머로 방처럼 생긴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도 클락은 브루스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낯선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친밀한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그에게로 걸어갔다.
“얘기 좀 해요, 브루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셀리나가 다 얘기 해줬으니까, 일어나요.”
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곁에 있던 남자가 무슨 짓이냐며 클락을 막으려 했지만 브루스가 일행이 왔으니 가봐야겠다고 그에게 말한다. 아쉬운 표정을 한 남자가 브루스에게 명함을 건네주려는 것을 클락이 뺏는다. 그리곤 어이없는 표정을 한 브루스를 잡아끌어 이끈다. 아까보다 커진 음악 소리나, 어두워진 조명. 사람들로 가득 찬 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클락은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봐, 브루스의 손을 세게 잡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새 시간이 지났다고 날이 어두워졌다. 약간은 쌀쌀한 기운이 몸에 감돌았다. 손 안에서 구깃구깃한 쓰레기로 변해버린 명함을 쓰레기 더미로 던져 넣었다. 브루스가 팔을 흔들어 클락의 손을 뿌리쳤다. 제가 꾸민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클락에 의해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 때문인지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번엔 또 뭐가 맘에 안 드는 거야?”
“저한테, 여자를 소개하려고 이런 곳에 데려온 거예요?”
"널 도와주려고 한 거야."
"제가 언제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언성이 절로 높아진다. 남에게 이렇게 까지 화를 내 본 적이 있던가. 클락의 생각에는 없던 것 같다. 더군다나 상대가 연상에, 교수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클락은 참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자신을 불러내어 차에 태우고, 옷차림에 충고를 해준 것이 다 이것 때문이란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얼마나 가슴 떨려했던가. 그의 말을 저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하고 시키는 대로 셔츠를 벗으며 고분고분 말을 들은 자신이 정말 바보였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입은 상처로 가슴이 욱신거린다. 무척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 덕분에 클락은 제 감정에 대해 깨닫게 된다. 저에게 상처를 준 남자가 피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사랑한다고 할까봐 그래요?"
"뭐?"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할까봐, 제 시선을 다른 사람으로 돌리려는 거잖아요."
"네가 착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 도와주려는 것뿐이었어."
"착각이라고요?"
클락이 또 다시 브루스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몸 전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을 잡아 당겨 제 가슴팍에 올린다. 얇은 니트를 사이에 두고, 그의 손이 클락의 가슴에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달음박질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브루스가 힘을 주어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클락은 놓치지 않았다.
“이게 착각이에요? 이렇게 뛰는데…!”
브루스는 클락이 손에서 힘을 풀어주고 나서야, 가슴팍에서 손을 치울 수 있었다. 조명은 없고 주변은 어둑어둑한지라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브루스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는 일부러 클락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넌 헷갈린 거야. 육체적인 자극에 의한 흥분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한 거라고. 교수라는 위치에 대한 동경이 섞였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누구라도 착각할 수 있다고.”
“자기감정도 구분 못하는 어린애 취급하지 마요! 교수님이야말로, 그게 그렇게 무서워요?”
“헛소리하지 마. 누가 뭘 무서워 한다는 거야?”
브루스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클락을 쏘아보는 눈빛이 칼에 베일 듯 날카롭다. 참아주던 것이 한계에 닿았는지, 불쾌의 기색이 얼굴에 노골적이게 나타난다. 언제나 여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점이 진짜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수업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까지 모두 그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고, 하나도 숨김없이, 빠짐없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닐 리 없다고.
“피하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든 나에게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잖아요.”
“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했을 뿐이야. 애초에, 단 한 번의 스킨십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말이 되나?”
“왜 말이 안 되는데요?”
“육체적인 관계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바뀐다는 것, 다 헛된 망상이야. 가슴이 뛰거나, 그때의 장면이 생각나는 것, 모두 상대와 관련된 쾌감과 흥분 에서 비롯한 거라고. 육체적인 것이 지나가면 사라질 것, 소나기처럼 한 차례 쏟아 붓고 사라질 것을 사랑이라고 하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글쎄, 경험해보면 다 그렇더라고.”
마지막 것은 도발이 확실했다. 클락의 소유욕이든 분노든 간에, 그것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클락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심지어 몇 명인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을 질투했다. 마치 제가 쫓아냈던 골목길의 그 남자들처럼, 당장 찾아내어 가만 두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잘 넘어가버리니, 애송이 취급을 받아도 별 수 없겠다. 그러나 순순히 당해주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저도 경험을 해봐야겠네요. 전 애송이라,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진짜 감정으로 착각해버릴지도 모르거든요.”
브루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말에 담긴 맥락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격해진 감정이 말했다.
“상대는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겠죠. 제가 사랑이라고 ‘착각’에 빠져있는 대상은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내가 그런 장난질에 함께 놀아나줄 거라고 생각하나?”
예상 외로 브루스는 담담했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 같이 허무맹랑한 말을 하며 덤벼들었던 제자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매력적이었고, 그를 사로잡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들게 하니까. 클락은 거절하는 상대방에게 억지를 쓴다거나 강요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저 물러설 수 없었다. 특히 상황이 자신한테 유리하게 펼쳐진 지금과 같은 때에는.
“애초에 그 사건이 발생한 계기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제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하셨잖아요. 그런 부적절한 방법으로.”
브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클락은 그 반응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협박이라니, 그것도 강제로 몸을 얻기 위한 협박. 평생에 상상도 못했던 범죄와 같은 것을 저지르면서도 클락은 스스로가 멈추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가, 부적절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함부로 제 몸을 맛보여주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으로 클락이 모든 것을 비밀로 삼켜 속에 사그라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교수와 학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만들어 놓고, 단단한 가슴에 틈을 만들어 놓고, 상상도 못했던 감정을 싹틔우게 했으면서. 물을 주지 않고 짓밟으면. 꺾어버리고 무시하면 그것이 사라져버릴 것이라 생각했을까. 클락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짓밟지 못하도록, 꺾어버리지 못하게, 그래서 무시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 할 거예요.”
그의 눈이 아주 느린 속도로, 깜빡였다. 잘근 씹은 입술이 아파 보인다. 분노, 아니면 두려움으로 기다란 손가락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클락은, 미안하다거나 불쾌한 기분보다는 전혀 다른 음란한 생각이 든다.
저 입술에서는 클락을 달아오르게 만든 천박한 말이 흘러나왔었고, 저 손가락으로 제 성기를 훑었었다. 정액을 품은 그 아찔한 눈빛을 다시 보고 싶다는 그것뿐이었다.